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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탄신일에 맞추어 거행된 이날 영정 봉안식 행사는 지난해 12월 30일 정부 표준영정 제105호로 고시된 이 분의 표준영정이 고향 후세들의 손에 의해 공식적으로 봉안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영정 속의 이 분의 모습은 말을 타고 종횡무진으로 왜구들을 격퇴하는 호방한 장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머니 시묘살이 중에도 왜구들의 침략에 풍전등화처럼 떨고 있는 영암의 백성들을 바라만 볼 수 없기에 대의를 위해 출전한 상복 입은 최초의 의병장이자 올곧은 선비의 모습이었다. 상복 속에는 효심 가득한 효자의 모습을 간직한 채, 활을 움켜쥐고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에서는 문무 겸비의 늠름한 기상이 드러나니, 과연 “군자는 그릇처럼 한 가지 기능에만 한정된 사람이 아니다(君子不器).”하신 공자 말씀에 딱 들어맞는 분이었다. 군수는 항복하고 관군은 몸을 사리고 있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영암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승리하였지만, 결국 기복출사(起服出仕)의 제약 속에 그 혁혁한 전공을 흔쾌히 묻어 두고 조용히 물러나와 못다 한 시묘살이를 계속했으니, 그야말로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지난 24일 거행된 공기(孔紀) 제2577년 춘기 석전제는 여느 해와 달리 그 여운이 남는다. 잘 알다시피, 석전제는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는 유교 의식으로 영암향교에서는 대성전의 5성과 동무와 서무에 각각 10현 등 총 25위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번에도 두 시간 가까이 석전제를 거행하는 동안 제관·집사들은 모두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임했지만, 집례(執禮)가 전달하는 한자 용어에 익숙하지 못하다보니 실수나 미숙함이 드러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익숙한 사람들로만 구성해서 진행한다면 매끄럽고 수월할 수는 있겠으나 대중성이나 확장성은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맞게 석전제의 의미를 업그레이드하여 대중성을 확장해가면서도 선현들이 남겨주신 소중한 전통을 지켜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하겠다.
이처럼 준비과정이나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소요되는 이 행사를 우리는 왜 해마다 두 번씩 엄수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석전제를 지내는 의미와 목적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옛 성현들이 사셨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서 우리 자신을 그분들과 일치시켜보고, 동시에 그분들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리에 모셔와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현재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삶이 흔들릴 때마다 양달사의 영정 앞에 서서 잠시 당시(當時)로 돌아가 시묘(侍墓)와 출전(出戰)을 놓고 고뇌하는 인간 양달사를 느껴보기도 하고, 또한 그분을 지금 내 자리로 모셔와서 ‘이 시대의 선비정신’에 대한 의견을 구해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 년에 두 번 석전제 때 만이라도 대성전 앞에 술잔을 올리며, 지금 어서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들의 유교 윤리를 재정립해 달라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구체적인 인의(仁義)의 실천 사례들을 알려달라고 청해보기 위함이리라.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6.05.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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