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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군부독재와 5.18 군홧발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저항해온 교육민주화운동 세력은 노태우 정권 초기인 1989년 마침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출범시켰다. 전교조는 출범과 동시에 1,500명 대량 해직의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일제강점기부터 줄곧 학교교육을 지배해온 일제 식민잔재와 군사문화 청산, 교내 학교장을 정점으로 한 오도된 봉건 유교문화 청산을 외치며 교육민주화를 실천해왔다. 그러나, 1994년 해고자 복직, 1999년 전교조 합법화, 2013년 법외노조 통보와 2020년 대법원 통보 취소 결정 등 힘든 과정을 거쳐오는 동안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파도처럼 밀려온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교육철학 정립과 합의 도출에 한계를 노정하였으며, 위 서적도 대학 내 교양과목 레포트 작성 참고도서용 정도로 침잠하였다. 그러다가 대략 10여 년 전부터 학교가 교권침해로 힘들어지면서 다시 읽혀지는 것 같다.
학교가 ‘학생인권’과 ‘교권’이라는 두 수레바퀴를 굴리면서 중용을 지키기란 이리도 어려운 일인가? 전교조 운동 초기에는 ‘교장-교감-부장교사-교사-학생’으로 하달되는 권위적 수직구조야말로 학생들의 창의력과 사고력, 민주적 의사 표현 능력 신장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보편인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취약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학생들의 인권부터 보장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 제도적 장치로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일부 학생과 학부모들에 의한 교권 침해 사례들이 발생하더니 점차 그 정도와 빈도가 심해지고 심지어는 교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어 엄청난 사회적 공분을 사게 되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모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교사를 흉기로 찌른 사건이 알려져 큰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는가?
그러다 보니 교권 침해가 급증하는 원인으로 학생 인권 옹호론자들의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요구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안을 놓고 볼 때, ‘교사와 학생’이라는 대립적인 관점에서 제로섬 게임을 하기보다는, 학생 인권 침해에서 교권 침해로 전도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전이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각 사안에 대한 적절한 처방전을 제시하는 윈윈 전략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학생인권 보장이 일제와 군부독재 하 수직적이고 권위적이었던 학교문화 타파의 마중물로서의 역할에서 더 나아가 항구적 민주주의 실현을 담보할 수 있는 여전히 유효한 보증수표라면, 교권 침해야말로 애초 일제와 군부독재의 권위주의 교육 체제가 신자유주의 경쟁교육 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간과해버린, 성현들이 물려주신, 전통예절 교육과 인성교육 회복을 향한 ‘타는 목마름’임을 함께 고백하고 모두가 그 치유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최소한 조선시대부터 1894년 갑오개혁 이전까지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서당, 서원, 향교는 명실상부한 학교였다. 특히 향교는 지역 공립 초·중등교육의 산실이었다. 비록 갑오경장과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교육 기능을 상실하고 문묘 제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지만, 그 이전에는 각 마을의 서당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인재들이 모여 경전을 읽고 시문을 겨루며 꿈을 키워갔을 것이다. 원래 향교의 두 기능, 즉 교육과 제사 중 보다 근원적인 것은 교육이었을 것이다. 영암향교 대성전에 모셔진 공맹 시대 5성과 동·서무에 배향된 20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되새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학문의 세계에 매료되어 그분들을 받들고 극진히 모시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차제에 우리 영암향교가 교육지원청 및 관내 학교들과 잘 소통하여 한자와 인성교육을 강화시키고, 이를 통하여 교권 회복의 새장을 열어가기를 기대해 본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2026.05.1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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