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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달사 영정은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연령인 30대 장군상으로 하되, 얼굴은 초본보다 갓과 눈썹 사이 간격을 좀 더 넓게 하기로 했다. 자세는 입상(立像)이며, 장군의 위상이 드러나도록 등에 활을 메고, 오른손에는 활을 든 정자세로 하기로 했다.
초본에 있었던 장독기와 등채 등이 제외된 것이다. 또한 복식은 묵최(墨 최 먹물을 들인 상복)로 하기로 했다. 상중에 벼슬에 나가거나 군사를 지휘할 때는 상복에 먹물을 들인 검회색 차림이었고, 양달사 관련 문서에도 상복에 먹물을 들이고 나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허리에 맨 요질과 백립도 검회색으로 통일하기로 했다.조선 전기 상복의 전문가들인 위원들은 매우 꼼꼼했다.
심수륜(1534-1589) 묘 출토복식 등을 참고해 소매, 고름, 주름, 폭 등을 수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신발은 검정가죽신(1493년 악학궤범 참조)으로 할 것이며, 규격도 족자를 고려해 좀 더 작게 그려줄 것을 주문했다. 당시 회의 결과 통보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영정 봉안장소에 대한 문의에, 제주양씨문중에서는 원본을 영암군립하미술관에 보관하고, 도포면 봉호리 봉의재(鳳儀齋)를 봉의사(鳳義祠)에 사본을 게시해 홍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다시 서류 보완 요청이 내려졌다.
양달사의 궁시(弓矢) 능력과 상복에 먹물을 들인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이었다. 궁시 능력은 이미 여러 문헌에 나와 있고, 중시에서도 급제했으므로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복식심의 전문가들도 모두 먹물을 들인 상복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들 했고, 그래서 그 문헌적 자료를 제출해 달라는 것이었다.
양달사현창사업회에서 제출한 문헌 근거는 아래와 같다.
묵최(墨최)
조선은 유교사회로, 효(孝)를 으뜸으로 보고 ‘대전통편’이나 ‘경국대전’의 ‘기복(起復 다시 벼슬에 나감)’조를 보면, 상중에 관직에 나갈 때는 예조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임금의 윤허를 받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심사를 받은 후에 나가도록 되어 있다. 또 다시 벼슬자리에 나갈 때는 상복에 먹물을 들여 입고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 상복을 묵최(墨 최)라고 한다.
‘예기’, ‘주례’ 등에서 묵최를 입어야 한다는 근거는 없으나, ‘세종실록’ 1439년 9월 18일 기사에도 ‘나라의 문정(門庭)에 도둑이 있으면, 비록 왕공(王公), 귀인(貴人)이라도 묵최(墨衰), 묵질(墨 질)로서 군사에 나가는 것은 옛날의 제도입니다.(且國有門庭之寇, 則雖王公貴人, 墨衰질而卽戎, 古之制也)’라고 되어 있다.
또한 ‘동문선’ 제29권에도 ‘계양수(桂陽守) 손득지(孫得之)가 기복(起復)을 사양한 데 대해 왕이 윤허하지 않으면서 내린 말(桂陽守孫得之讓起復不允批答)을 보면, 대저 아들 된 사람이 상제(喪制삼년상)를 마치려고 함은 진실로 인정이요 예절이니, 마땅히 못하게 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공자가 묵최(墨 최)를 입고 직무를 수행하게 마련한 것은, 대개 또한 형편에 따라 알맞게 행동하게 한 것이요, 반드시 어버이께 박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다.(夫人子之欲終喪制固其情也禮也 宜若不可奪之 然仲尼所以制墨최從事者 蓋亦順變適宜 而非必薄於親者也)’라고 했다.
그리고 ‘양달사 장군 문헌집’ 27쪽, 42쪽, 69쪽, 81, 113쪽 등 원문에 다수 보인다. ‘양달사 장군 문헌집’ 번역본을 보면 ‘상복차림’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이영현이 번역시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한 것이고, 원문 27쪽을 보면, ‘묵최 차림으로 성에 들어가니(墨䙑入城中)’라고 되어 있다. 모두 먹물을 들인 상복을 입고 갔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그날 복식심의 위원들은 이 설명을 듣고 모두 수긍을 했고, 묵최 차림으로 영정을 그리기로 결정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2026.07.2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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