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 영암군민신문
  • 승인 2019.05.24 14:57
  • 호수 56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산강유역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서호면 장천리 수혈주거지는 청동기시대 독특한 형태의 선사문화 존재의 흔적"

Ⅰ. 들어가는 말

엄길리 지석묘군

우리는 반만년 운운하며 한국의 역사가 만만치 않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며 자랑스럽게 여긴다. 물론 우리 역사의 독자성과 유구함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러 우리 역사는 일제의 강점기로 단절되고 부끄럽게도 오늘날까지 그 잔재인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역사학계의 통렬한 반성과 다년간의 피나는 노력으로 우리 역사학에 대한 얼마간의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 역사 연구의 빈약함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자랑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잦은 주변 국가의 침략으로 전해지는 역사서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겨우 걸음마 수준이다.
특히 한반도 서남부의 금강 이남의 마한 중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은 한반도 중에서도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묘제와는 다른 고분 문화인 옹관묘와 일본식묘제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이 산재하며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아직은 주목할 만한 성과가 없지만 이 지역의 문화적 성격을 두고 우리 역사학계는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에 기해년 새해를 맞아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을 중심으로 한 영산강 유역의 마한 문화를 한국역사학계와 지역향토사학자들의 연구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Ⅱ. 우리나라 고고학의 시대구분

장천리 선사주거지

역사학에서 학문적 실증적으로 역사의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구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고고학에서는 덴마크 톰센이 인류가 사용하는 도구에 따라 시대를 구분한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의 삼분법을 따르고 있다. 그 중 석기시대는 타제석기를 사용한 구석기 시대와 마제석기를 사용한 신석기 시대로 나누기도 한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대부분을 석기시대 그것도 구석기에 머물렀다.
오랜 세월을 사냥과 채집의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인류는 신석기시대에 마제석기를 사용하면서 농경을 하며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물론 이 시기의 정착생활이 신석기인의 일반적 상황은 아니었지만, 이를 흔히 산업혁명에 비견하여 신석기 혁명이라 한다. 신석기 시대는 마제석기(돌을 갈아 만든 석기)를 사용하여 농경을 시작하였고 생산물을 빗살무늬 토기로 저장하고 요리하였다. 마제석기와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이 시기의 취락은 주로 하천가나 바닷가에 위치하여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산기슭이나 구릉에 위치한 것과 대비된다. 이는 마제석기가 기술적으로 정교하고 수준 높은 도구였음에도 불구하고 농경에는 효율성이 떨어져 지반이 연약하고 어류의 채집이 용이한 곳을 선호하였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석기시대 즉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를 우리는 고고학적으로 선사시대라 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B.C. 10세기경에 부족장무덤의 고인돌과 동검 그리고 민무늬 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동검은 초기의 비파형과 후기의 세형동검이 있다. 우리가 동검에 주목하는 이유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오직 중국의 요녕 지방과 우리 한반도에만 분포되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 서남부의 해안을 따라 전해지고 이후의 세형동검은 점차 한반도 내륙으로 퍼져간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동검의 분포는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검의 용도를 놓고 장식용과 무기였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이 시기에 평등한 씨족사회에서 처음으로 빈부의 차이가 나타나고 지배 피지배 관계가 생겨 국가형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태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고인돌이다. 고인돌을 만들려면 상당수의 인력 동원이 필요하고,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지배력이 있어야 했다. 이때의 청동기는 지배세력인 일부 집단만이 소유했고 생활도구는 대다수가 아직 석기였다. 또한 뒤이어 기원 전후 늦어도 A.D. 3,4세기에는 철기시대로 넘어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청동기시대는 매우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시대를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이 시대에 국가가 처음 출현하였고 인류가 역사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영산강유역 마한의 독특한 문화도 청동기시대에 출범하여 초기 철기시대 때까지 계속되었다. 기원 전후에 시작되는 철기시대는 일부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와 겹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는 대부분의 생활도구가 석기였으나 철기시대는 대부분의 도구를 철기로 만들었고 오늘 날 우리는 철기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시대구분은 다양한 이론(異論)에도 불구하고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로 분류하고 있다.
엄밀히 우리나라 삼국시대는 대가야가 멸망한 서기 562년부터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까지 백여 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앞에 북쪽의 낙랑을 통한 중국의 한대문화와 남쪽의 지석묘사회에 북방의 철기문화가 퍼져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원삼국시대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원삼국시대에 대한 학계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으나 그래도 가장 많이 사용되는 명칭이라 여기서는 이 구분법을 따른다.

Ⅲ. 영산강 유역의 선사 유적

한반도에 언제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1932년 함경북도 온성군 동관진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으나 일제가 일본열도에 아직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시되고,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구석기 유적으로 제대로 평가되었다. 해방이후 1962년에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유적이 1964년에 그 유명한 충남 공주군 석장리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 유적들로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이후에 현재까지 한반도 내에 110 여 곳 중 남한에 80여 군데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로 주목되는 곳으로는 이외에도 평안도 상원 검은 머루 동굴, 덕천 승리산 동굴, 제천 점말동굴, 연촌 전곡리 유적 등이 있다. 전남에서는 주암댐 수몰지구와 곡성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영산강 유역의 구석기 유적지로는 광주 산월동, 치평동, 함평 당하산, 화순 도산, 영광 원당 마전 군동, 나주 당가, 무안 피서리, 장흥 신북 등이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한반도는 물론 영산강유역에는 오래 전부터 인류가 생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연동굴에서 살며 깨진 돌을 그대로 사용하던 인류가 돌을 갈아 도구를 만들고 흙을 빚어 토기를 제작하여 움집에서 생활하며 사냥과 채집생활을 하게 되었다. 돌을 갈아 만든 마제석기와 토기를 발명한 신석기시대는 인류문화의 첫 번째 혁명이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이 빗살무늬토기여서 신석기 시대를 빗살무늬토기시대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반도의 신석기유적지로는 두만강 유역의 굴포리,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 부산시 동삼동 등이 유명하다. 한반도 신석기 유적지는 5백여 곳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강가나 해안가에서 점차 내륙으로 확산되어 갔다. 전남 해안 지방과 도서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들이 발견되는 곳이다.
신석기시대 인류는 주로 강가나 해안 지역에 살면서 사냥. 채집. 어로와 농경생활을 시작하였고, 이에 적합한 도구를 사용하였다.
역사적으로 신석기시대는 농경을 핵심적 문화양상으로 하기에  벼농사의 기원을 밝히는 고고학적인 문제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이 청동기시대에서 이어졌다고 보기에 이 두 시기의 구분은 문화인류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구석기인은 현재 우리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리하여 현생인류의 기원을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중 어디로 비정할지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더불어 청동기시대가 초기 철기시대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혼재하고 있어 역사학계의 이견을 낳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과제라 하겠다.

Ⅳ. 영산강 유역의 청동기시대의 문화
 
영산강유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에서 선사시대의 수혈주거지(땅에 1미터 이내의 구덩이를 파서 만든 움집터)와 고상가옥지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무문토기와 반월형 석도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 전 5세기~3세기의 청동기 시대로 수렵과 채집이외에 반월형 석도로 보아 일부 농경을 하였고 지석묘제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독특한 형태의 선사문화가 한반도 서남부의 영산강 유역의 영암지역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고대의 농경 그 중에서도 벼농사가 중국 양쯔강 유역의 하모도와 양쩌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청동기시대의 농경문화는 벼농사이이고 이를 대표하는 유물로는 반월형 석도가 있다. 반월형 석도는 청동기시대에 곡물의 이삭을 자르는데 쓰는 도구이다. 영암 장천리 유적지에서 반월형 석도가 발견되어 일찍이 영산강 유역에서도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주 신창동유적지에서는 탄화미와 다량의 왕겨 그리고 다량의 농기구가 발견되어 영산강 유역의 농경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이를 유추해 보면 영산강유역에는 일찍이 농경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시작된 벼농사는 한반도에 전해지고, 한반도 남부에서 더욱 발달하여 일본열도로 전해진다. 일본 열도 중에서 구주지역의 북부에서 가장 먼저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 그것도 영산강 유역에 사는 사람들이 일본에 벼농사를 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