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 영암군민신문
  • 승인 2019.05.31 14:26
  • 호수 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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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산강유역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영암용범은 영암 등 영산강 유역에 수준 높은 독자적 청동시대 존재사실 입증"

우재 이원형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부족장 무덤인 고인돌과 동검 그리고 민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본다.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나, 한반도에 세계 고인돌의 40%인 4만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특히 남한에 3만여기 중 전라남도에 2만여기가 소재하고 있다. 남한에 분포하는 고인돌 중 전북 고창의 400여기, 강화의 120여기, 전남 화순의 500여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인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순천시 송광면에도 500여기의 고인돌이 소재하고 있으나 주암댐 건설로 제자리에서 옮겨져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는 지정받지 못했다.

시종내동리 쌍무덤

영산강 유역인 영암지역에는 83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가장 많은 고인돌이 소재하고 있음에도 보호에 소홀하여 일부 훼손되어 문화재로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고인돌의 분포로 보아 이 지역에는 일찍이 부족장이나 군장이 지배하는 유력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청동기 유물은 발견되지만 직접적인 제작의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의 식민사관에서는 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영암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벽한 형태를 갖춘 청동기 용범(청동기를 찍어낸 거푸집)이 발견되어 한반도에 독자적인 청동기시대가 존재함이 확인되었다. 숭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영암 출토 용범은 세형동검과 동과, 동부, 낚시 바늘 등 다양한 형태의 13점이 일괄 국보 제291호로 지정되었다. 영암용범은 영암군 학산면 독천에서 출토된 것을 알려져 있다. 특히 영암용범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여타 용범과는 달리 내부가 까맣게 탄 흔적으로 보아 연거푸 사용된 점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인근의 화순군 백암리 출토 동과(청동 창)와 함평군 초포리 출토 동부(청동 도끼)의 거푸집으로 확인되어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임과 동시에 세계 고고학적으로 그 유례가 드문 사실로서 우리 청동기시대의 고고학 연구의 획기적 단서를 제공하는 유물이다. 이로써 영암을 비롯한 영산강 유역에는 한반도내에서도 수준 높은 독자적인 청동시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 전후 백제, 신라, 가야의 모태가 된 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은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시대구분에 있어 삼국시대 이전의 원삼국시대를 삼한시대로 칭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 같이 한반도 서남부 즉 경기, 충청, 전라도는 삼한 중 마한의 영역이었다. 마한의 목지국을 다스리는 진왕은 삼한을 대표하였으며, 목지국은 충남 천안이나 전북 익산 등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마한의 목지국은 고조선의 준왕이 중국 한의 압박으로 남하하던 시기에 이미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었다. BC 4세기에 대륙에 위치한 고조선을 중국 연의 진개가 침입하였다. 이에 많은 유민이 전란을 피해 한반도로 흘러 들어왔다. 특히 고조선의 준왕이 멸망한 BC 194년경에는 일부 망국민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때는 고인돌과 민무늬토기로 대표되던 시기가 서서히 쇠퇴하고 덧띠토기와 한국식동검인 세형동검이 만들어지던 시기이다. 진왕의 묵인 아래 백제가 마한의 영역인 한강 유역에 자리 잡아 AD 3세기경에는 한반도 서남부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고대국가를 형성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Ⅴ. 영산강유역의 초기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과 전방후원분)

기원을 전후하여 한반도 서남부에 자리한 마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고대국가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에 자리 잡은 마한은 주변세력간의 다툼에서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문화를 형성하며 독특한 고분문화를 발전시켰다. 
당시 지배세력의 무덤인 고분의 발생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4세기경에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면서 강력한 통제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권위와 위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커다란 무덤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영산강 유역에는 주로 마한시대와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분들이 혼재해 있다. 특히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등 영산강 유역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묘제인 대형옹관묘가 집중적으로 소재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 분포된 옹관묘 고분 250여기 중, 영암 시종 일대에 150여기가 소재하고 시기도 인근 나주 반남보다 앞서고 있다. 그래서  고고학계에서는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가 영암의 시종일대를 중심으로 발전되다가 점차 나주 반남 주변으로 이동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주류 역사학계의 견해에 의하면 충청 이남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속하였고 영산강 유역인 전라도 지역은 4세기에 백제에 복속되었다고 한다. 과연 사실일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서 유흥준은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 무덤에서 다섯 개의 옹관이 나오고 그 가운데 옹관에서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고고학의 역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인데 대체로 삼한시대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한은 충청, 호남에 근거를 두다가 백제에 밀려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영산강까지 밀리고, 5세기 말에는 완전히 굴복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이 반남 고분군은 대개 5세기의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죠.” 이상의 설명처럼 반남 고분군은 마한의 유적이라는 것이 현재 우리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삼국사기에는 4세기 백제 근초고왕 때 마한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백제 근초고왕이 남만(南蠻)이라 칭한 침미다례(?彌多禮)를 정벌하여 도륙(屠戮)했다고 한다. 도륙이란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침미다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이 추정된다. 역사학계는 영산강 유역의 침미다례를 지금의 전남 해남 일대로 보고 있는데, 이때에 백제는 비로소 영산강 유역의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백제의 정벌로 마한의 잔여세력은 인근의 영암 시종 일대로 거점을 옮기고 다시 나주 반남으로 중심세력이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시종의 고분이 반남의 고분보다 시기에서 앞선 점으로 보아 무리한 추정은 아닌 것 같다. 또한 이때에 거점에서 밀려난 일부 세력은 바다 건너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 곳곳의 야요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활약하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영산강 유역인 전남지역을 백제가 지배하였다 할지라도, 백제는 곧이어 북쪽의 고구려의 거센 공격으로 인한 북방전선의 위기로 영산강 유역의 거점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적극 대항하여 북방전선에 전념하여 상대적으로 남방에 소홀하거나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역의 마한 토착세력은 독립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영산강 유역은 대형 옹관이 여러 기 매장된 이 지역의 독특한 무덤양식의 옹관묘에서 보듯이 백제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도 오랜 동안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며 고유문화를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점차 백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복암리 3호 고분 같은 백제식의 고분이 축조되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우리나라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인 영산강유역의 고분의 실체를 고고학계의 연구를 통하여 추적해보자. 이 지역 고분의 매장방법은 다른 지역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거대한 하나의 고분 내에 여러 개의 시신을 담은 옹관이 합장되어 있거니와 그 안에 호화로운 금동관이나 금동장신구는 물론 많은 무기류가 부장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이 고분들이 일본의 고분들과 비슷한 모양에 주목하였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는 1917~1918년에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과 덕산리 1,4호분 그리고 대안리 8,9호분을 발굴 조사하였다. 일제는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신촌리 9호 을(乙)관에서 현재 나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제 295호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수 많은 유물을 발굴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고분의 장법(葬法)과 발굴된 유물로 보아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거라며 자세한 것은 나중에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란 보고서를 제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제출하겠다는 보고서는 끝내 나오지 않고 1차 발굴조사 20여년 후인, 1938년에 신촌리 6, 7호분과 흥덕리 석실고분을 발굴 조사하였다. 이때 조사에 참석한 일본학자는 “도굴의 횡액으로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고 신촌리 6호분에서 겨우 2개의 옹관만 수습했다”고 회고하면서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 당해 완전한 봉분이 거의 없었다고 한탄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20여년 전 1917년의 1차 발굴에서는 고고학계가 흥분할 정도의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에 비하면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이는 일제가 1차 발굴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고 발표하고도 이 고분지역에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함으로서 오히려 도굴꾼에게 도굴장소를 안내한 꼴이 되고 말았다. 고분의 장례방법이 아마 왜인의 것이라던 일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의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 내에서 왜인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었으면 침묵하거나 도굴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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