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역사탐방
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역사탐방
  • 영암군민신문
  • 승인 2019.06.21 14:31
  • 호수 5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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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 영산강유역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시종·반남 고분 주인공 밝히는 것은 우리 고대사 최대 미스터리를 밝히는 일"
우재 이원형

그런데 왜 그랬을까?
어쩌면 영산강 유역 마한의 반남고분의 출토유물이 그들의 임나일본부의 주장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 즉 그들의 주장처럼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반남 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점을 증명해 주는 유물이었기에 그대로 덮어버리고 도굴을 조장한 것으로 추정함이 타당하지 않을까?
반남 신촌리 9호분 을(乙)관에서 발굴된 찬란한 금동관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금동관은 출토된 지 80년만인 1997년 국보 제 295호로 지정되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나주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금동관은 금동의 모관과 대관 즉 관으로서 안과 바깥이 완전한 세트를 이루어 발굴된 국내 유일의 것이다. 신촌리 금동관은 다른 지역에서 발굴된 백제의 금동관과는 확연하게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는 이 지역 고분의 주인공이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집단임을 증명하는 자료이자 그들 세력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금동관이 발굴된 고분을 축조한 사람들은 한반도 서남해안의 요충지인 전남내륙 진출의 교두보로 나주 반남을 경영하고 백제와는 다른 영산강 유역의 수준 높은 고대문화를 꽃피운 주인공으로 보여진다.
영산강 유역에는 일본식 묘제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원(圓)형의 분구 앞에 사각(方)형의 단상부가 합쳐진 무덤. 모양이 장고 같다 하여 장고형분(長鼓形墳)이라고도 함.) 10여기가 발견되고 있다.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은 한반도에서는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어 그 성격을 두고 한, 일 양국의 고고학계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일 양국은 역사인식에 있어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은 고대사에, 한국인은 근대사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고대사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에서 일본 고대사를 무조건 무시한다. 일본에서 유행한 전방후원분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자,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마한 시대의 묘제가 일본에 전해졌다는 주장이 어김없이 우리 학계에서 나왔다.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전방후원분은 반남 고분보다 늦은 시기인 대개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시기적으로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 보다 빠른 3세기 초반부터 조성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열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아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로서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의 고분과 일본의 영향을 받은 전방후원분을 조성한 고대 영산강 유역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우리 고대사의 최대 미스터리를 밝히는 것임은 물론, 한일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고대 한일관계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로 자리매김하여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일부 학자들은 고대 사서에 나오는 왜(倭)의 위치가 한반도 밖인 일본열도가 아니라 한반도 안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었고, 반남 고분의 주인공이 왜인이라는 흥미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고대 중국사서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倭)가 일본의 역사가 아니라, 발해가 중국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인 것처럼 우리 조상들의 역사라며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 위치한 왜가 일본 열도까지 진출하여 활약하였고, 한반도에서는 점차 고구려와 신라의 공세로 일본열도로 밀려나 일본 고대문화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나 보다 심도 있는 실증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왜가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그것도 시종과 반남의 고분을 축조한 세력이라면, 4세기경 침미다례의 정벌은 백제 근초고왕과 영산강 유역의 왜가 연합하여 수행하였을 것이다. 

Ⅵ. 고대 영산강유역 문화의 일본 전래와 일본과의 문화교류

한국과 일본 양국은 극단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은 고대사에, 일본인은 근대사에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나름대로 상당한 근거가 있으며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도 않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서로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각자 자기 탓이라는 반성에는 인색하고 서로 상대방 탓을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양국 간의 우호와 교류가 필요한 이유는 한일 양국의 움직일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양국 간의 불편한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아무리 선린적인 교류를 주장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열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우리 한국인 대부분은 일본 역사를 잘 모른다. 학교에서 일본 역사를 가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에 일본에 선진문명을 전수하여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 문명의 토대를 제공했다는 일방적 문화적 시혜만 강조하여 가르친다. 이러한 실상은 한일 양국이 공히 마찬가지이다. 또한 우리는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가 역사왜곡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유리한 기록은 인용하여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이중적 시각을 가지고도 있다.
우리가 고대사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주장하고 일본의 열등함을 강조하지만, 고대 일본의 조몬인은 이미 BC 12700여년에 세계에서 최초의 조몬 토기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섬나라 문화는 수준이 우월한 대륙으로부터 전래 된다는 기존의 일반적 견해를 뒤집는 것으로 지금도 세계 고고학계는 일본 토기가 불러온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탄소측정연대의 일본기록을 깨기 위해 아시아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고고학자들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 기록을 아직 깨지 못하고 있다. 다행히(?) 이러한 조몬인은 현대 일본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닐 것이라는 학설이 우세하여 한국인과 중국인을 안심(?)시키고 있다.
일본의 고대 조몬인은 수렵과 채집을 했음에도 양호한 주변 환경으로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였고 인구 밀도도 높았다. 상대적으로 풍족한 조몬인은 한반도의 열악한 초기 농업생산력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한국인도 굿이 일본에 농사를 전파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대륙에서는 식량을 생산하는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였지만, 일본은 이를 수용하는데 소극적이어서 조몬인의 미개한 생활은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BC 400년경 한반도 남부 즉 영산강 유역에서 새로운 생활양식과 사람들이 도래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에 현재 일본인의 조상이 누군가에 대한 견해가 나뉘게 되었다.
일본인의 기원에 관한 대체적인 기존의 학설로는 첫째, 일본인의 기원을 BC 2만년 전 빙하기에 일본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점차 진화했다는 견해이다. 이는 대부분의 일본인이 선호하는 이론이다.
둘째,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기마민족이 AD 4세기 경 한국을 거쳐 일본을 정복했다는 이론이다. 이 두 이론에 의하면 그들은 결코 한국인이 아니다.
셋째, 많은 서구 고고학자와 한국인이 선호하는 이론으로 일본인이 BC 40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서 벼농사와 함께 이주한 사람들의 자손이라는 설로서 일본인은 결코 수용하지 않는 이론이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거론된 사람들 모두가 섞여 오늘의 일본인이 되었다는 설이다.
아무튼 BC 400년경을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전래된 새로운 생활양식은 한반도 가까이에 위치한 일본 남서부 규슈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금속기가 이용되고 농경문화가 자리 잡았다. 마을을 이루며 논에서 벼를 경작하고 새로운 토기를 사용한 이러한 새로운 생활양식을 일본인들은 '야요이'라 명명했다. 야요이 토기는 동시대의 영산강 유역의 한국산 토기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야요이 문화는 많은 요소들 예를 들어 청동기, 직조기술, 유리구슬, 쌀 저장 토기, 매장 풍습, 여타 도구와 움집 등이 모두 한국적이어서 일본열도의 이전시대와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규슈지방은 조몬 시대가 야요이 시대 700여년보다 열배 넘게 지속되었지만 야요이 시대의 유적지가 훨씬 많이 발굴되었다. 규슈 사가현의 요시노가리는 야요이 시대의 대표 유적지로 600여 년간의 마을 자취가 고스란히 발견되어 세계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으며 일본 당국은 이를 대대적으로 복원하였다.
요시노가리 출토 유물은 모두 한반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한국식 동검과 다뉴세문경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상징적 유물이다. 토기는 우리나라의 민무늬 토기이며 독무덤인 옹관묘는 영산강 유역의 형태 그대로다. 요시노가리의 유물이 한반도 그것도 영산강 유역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확인되어 2007년에는 우리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사가현 교육위원회가 공동으로 '요시노가리, 일본 속의 고대 한국'이라는 뜻 깊은 대규모 기획전을 열었다. 이는 2천 년 전의 한일양국의 문물을 전시하는 최초의 기획전으로 앞으로 이러한 문화적 교류가 자주 개최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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