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역사탐방
향토사학자 우재(愚齋) 이원형의 역사탐방
  • 영암군민신문
  • 승인 2019.08.02 14:54
  • 호수 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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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의 수수께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 영산강유역 마한(馬韓)을 중심으로

"도래인은 일본 곳곳 한국문화를 찾는 길잡이이자 우리 고대사를 밝히는 열쇠"

우리가 일본 야요이 시대를 주목한 이유는 한반도 영향을 받은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통일된 일본이 출현하였다는 점이다.
3세기 초반을 전후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이라 불리는 거대한 고분이 일본 혼슈 기나이 지역에서 축조되기 시작하여 점차 야요이 문화권인 규슈에서 혼슈 북부에 이르는 일본 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백설조 고분군에 있는 다이센 고분은 길이 450미터, 높이 30미터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무덤으로 중국의 진시황릉,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3대 능묘로 꼽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렇게 거대한 무덤을 축조하는 데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일본 전역에 이런 고분이 분포한다는 사실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 통일을 이룬 강력한 통치자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 일본에는 중앙집권체제인 야마토정권이 수립되어,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선진문화가 전래되어 일본이 자랑하는 비조문화(아스카문화)가 꽃피어 변방이던 일본이 세계사에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도래인이 이룬 아스카 문화는 서기 710년 야마토 정권이 나라로 천도하면서 쇠락하여 역사적 유물로 남게 되었다.

일본식 무덤인 전방후원분은 한반도에서는 오직 영산강 유역에서 10여기가 발견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은 일본에 비해 규모도 작을 뿐더러 시기도 일본보다 훨씬 늦다. 그리하여 이를 축조한 주인공에 대하여 영산강 유역에 와 있던 일본 지도층의 묘로 보는 견해가 등장했다. 가야가 멸망한 후 왜가 한반도와의 교류를 영산강 쪽으로 옮기고 영산강 유역에 파견된 왜의 지도급 무덤이라는 주장인데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견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리하여 등장한 주장이 한반도 남부인 영산강 유역에 위치한 왜가 점차 고구려와 신라의 공세에 밀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열도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때에 한반도에 남은 왜의 세력이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을 건조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은 이 지역이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소위 경청해 볼만한 견해라고 본다.
일본은 어쩜 일본 왕실의 조상 무덤일지도 모를 이 고분의 발굴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일본의 중앙 집권 정치체제의 구축을 증명하는 고분시대에 한국은 불교, 문자, 승마, 자기, 야금술 등을 대륙에서 들여와 일본에 전파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주장대로 한국이 일본을 점령한 것이든, 일본의 주장대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든, 일본은 한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한국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한 일본은 자기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8세기 초에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저술하면서 천황제의 확립을 위해 허구의 전설을 역사로 미화시켰다. 이 책들이 쓰여 진 8세기 초 일본은 자신들이 신라보다 우월하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여 한반도에서 전래받은 문명과 개화의 혜택을 모두 자신들의 한반도를 지배한 결과로 둔갑시켜는 역사왜곡을 저질렀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퓰리처 수상작인 <총, 균, 쇠>의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란 논문에서 현재 세계에서 그 문화와 환경에 있어 가장 특색 있는 민족으로 일본을 들고 그들의 조상인 조몬인과  야요인은 누구이며 그들의 문화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나름의 시각으로 설파하고 있다. 1만여 년을 지속된 조몬 시대가 700여년 간의 짧은 야요이 시대로 급격히 변화를 이루는 과정은 일본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다. 분명 B.C. 400여년경에 중대한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무엇일까를 조명하면서 일본인의 조상에 관하여 세 가지 학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에 일본에서는 이 세 가지 학설을 두고 열띤 논의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첫 번째 학설은, 수렵민인 조몬인 자체가 현재 일본인으로 진화했다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한국인의 유전자가 일본인의 유전자로 전해졌다는, 일본인에게 환영받지 못할 주장을 축소시키고 일본이 1만여년 간 독자성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일부 일본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주장이다.
두 번째 학설은, 위의 학설을 지지하는 일본인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견해로, 야요이 시대의 변화가 어마어마한 한국인이 농업과, 기술 그리고 문화를 가지고 엄청나게 대량으로 이주한 결과 소수의 조몬인을 압도하여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가져와 현대 일본인은 지난 2000년 간 그들의 고유문화를 수정 발전시켜온 한국인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 학설은 한국에서의 이주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규모는 아니고 벼농사를 짓는 숫자는 적지만 생산성 높은 농경으로 적은 이주자의 수가 조몬인등 보다 빠르게 불어나 그들을 압도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결국에는 일본인의 조상이 이주인(한국인)이라는 견해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두 번째나 세 번째의 학설을 보다 타당하게 여긴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DNA 조사 결과, 한국인과 야요인의 유전자가 아이누인과 조몬인의 비율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난 사실로 보아 오늘날의 일본인의 조상은,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야요이를 지배한 한국인 그리고 아아누인과 조몬인의 혼혈아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이는 결국 한국과 일본은 문화적으로는 물론 생물학적으로도 같은 유전자를 가진 형제라는 말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일 양국인은 언어보다 외모나 유전자에서 더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면서, 자기의 주장은 한일 양쪽에서 환영받을 수 없을지라도 고대에 양국이 쌓은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하면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밝다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또한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국과 일본은 A. D 300년~700년 사이에 사람들이 왕래하고 물자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매우 풍부하지만, 이를 두고 한국에서는 일본을 점령하여 일본 왕실을 세웠다고 주장하며, 일본에서는 한국을 점령하여 한국에서 장인을 보낸 온 것이라 맞서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일본 고고학계가 냉철한 논쟁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황국사관으로 인하여 과거에 대한 해석이 일본인의 현재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적절히 진단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다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고대 문화는 한반도 그것도 영산강 유역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오늘의 일본의 모체가 된 야요이 시대의 수경 벼농사와 청동기 문화, 전방후원분으로 대표되는 고분시대의 철기문화와 도기문화, 그리고 아스카 나라시대의 찬란한 불교문화와 규슈의 도자기 문화는 누가 뭐라 해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이 이룩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흔히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문화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사실로 이는 충분히 증명된다. 같은 맥락으로 일본의 청동기시대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열도를 점령하다시피 하여 이룬 문화이며, 왕인박사의 문자의 전래는 일본의 문명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로 보아 어쩜 오늘날의 일본인 조상이고 고대 일본문화의 주인공이었던 도래인은 과연 누구인가? 도래인은 지금도 일본 곳곳에 남아 있는 한국문화를 찾아가는 길잡이이자 우리 고대사를 밝히는 열쇠이다.
일본의 황국사관에서는 도래인을 '천황의 덕을 흠모하여 귀순한 사람'이라는 귀화인으로 표현했다. 일본의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소위 황국사관에 의해 일본 왕이 신의 핏줄이라는 틀에 맞추어 역사를 설명해야 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은 8세기 초에 소위 천황제 확립을 위해 통일신라 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시대적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허구의 전설을 역사로 미화시키고, 한반도에서 받은 문명의 혜택을 모두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결과로 둔갑시킨 왜곡의 사서인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편찬하였다. 더 나아가 근대에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황국사관을 만들어 일본서기의 왜곡을 사실로 호도하여 우리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역사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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