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세미나 요지
제2회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세미나 요지
  • 영암군민신문
  • 승인 2022.06.17 15:17
  • 호수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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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조선 최초의 의병장 양달사 장군 학술세미나가 지난 6월 10일 영암교육지원청 시청각실에서 양달사현창사업회(회장 장만채) 주최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는 제1부 개회식에 이어 제2부 학술대회가 열려 전남대 역사학과 김병인 교수를 좌장으로, 호남의병연구소 노기욱 소장의 ‘의병의 사표 양달사 장군의 의병 활동과 영암 의병 활동의 계승’, 전남대 문화유산연구소 정현창 전임연구원의 ‘영암지역 왜구 침입 경로와 영암 선소의 중요성’, 양달사현창사업회 이영현 사무국장의 ‘영암성대첩 기념사업 추진 방안’ 등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주제발표에 이어서는 영암문화원 김한남 원장과 김용철 전 동경대 연구원, 박일훈 전 초당대 교수 등이 참여해 질의 및 종합토론도 있었다.
이번 학술대회 주제발표문 가운데 두편의 발표문의 주요내용을 싣는다. <편집자註>

□ 의병의 사표 양달사 장군의 의병 활동과 계승

16세기 서남해안 일대에 빈번하게 왜구가 출몰하자 조정에서는 1521년(중종 16) 왜구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고자 가리포에 첨절제사진을 설진했다. 1522년(중종 17)에 가리포진은 영암 달량진의 수군을 이관받게 된다. 소속된 진은 영암 어란포진, 장흥 회령포진, 강진 마도진, 진도 금갑도진, 진도남도포진 등이었다. 대동지지 영암군 진보조는 가리포진의 설치 연대를 1522년(중종 17)으로 기록하면서 ‘달량진을 가리포진으로 옮기고 만호를 권관으로 대체했다가 후에 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가리포진의 신설을 통해 서남해안 방어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취한 조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평소 왜구들이 서남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거치는 물목이 달량포라는 점에서 이는 해안 방어의 공백을 발생하게 했다. 우려대로 가리포진과 어란포진 사이 달량포 공백지대는 왜구들의 상륙지가 됐다. 이를 계기로 전운이 시작됐다. 1555년(명종 10) 5월 을묘왜변이 발발한 것이다.
을묘왜변은 삼포왜란 이래 왜구의 세견선이 조선과의 무역에 제약을 받자, 70여척의 선박과 군사 6천으로 서남해안지역을 침공한 사건이다. 왜구들에게 영암·강진·진도 일대가 약탈당하게 됐다. 왜구와 전투 중 조선군 병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가 됐다. 왜구들은 분탕질한 전리품을 수레에 싣고 영암 향교에 들어가 진을 쳤다. 그러다 영암 양달사 장군의 의병부대에 기습공격으로 크게 패퇴했다. 이후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로 급파해 왜구를 토벌하게 했다.
이 글에서는 첫째, 향토방위를 위한 의병 부대를 조직해 국난극복에 앞장 서 호남 의병의 사표로 자리매김한 양달사 장군의 활동을 살펴보고, 국난극복에 앞장선 양달사 장군과 의병 부대의 정신을 계승한 영암 지역민의 임진의병 활동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영암군민의 숭고한 충의 정신 발굴과 역사적 정체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 양달사 장군의 의병활동
양달사(1518년∼1557년)는 자가 도원(道源)이고, 호는 남암(南巖)이며, 본관은 제주(濟州)다. 감역 양흥효의 증손이며, 주부 양승조와 청주 한씨의 둘째 아들로, 서기 1518년(중종 13년) 무인 2월 2일 영암군 도포면 봉호리 봉호정(鳳湖亭)에서 태어났다. 집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했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간(淸簡)으로 임했다. 남달리 총명 출중했고 용기가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는 자질을 갖고 있었다. 삼종숙인 양팽손의 문인이다. 화순군 도암면 월곡리에서 고향에 돌아와 시종면과 도포면 경계 태산봉에 정자를 지어 남암정이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했다. 그는 무예에 능하고 학문 또한 성리와 경서에 통달했다 한다. 1536년(중종 31)에 무과에 급제했였고 1544년(중종 39)는에 중시에 합격했다. 전라좌우우후와 진해현감을 역임했다. 1553년(명종 8)에 해남현감으로 부임해 있던 중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1555년 5월 11일 왜구들이 배 70척에 군사 6천으로 서남해안 일대에 상륙했다. 달량 권관 조세현이 왜구와 교전을 벌였다. 가리포첨사 이세린이 즉각 병사 원적에게 치보하자, 원적이 장흥 부사 한온, 영암 군수 이덕견 등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달량으로 달려갔으나 포위됐다.
5월 13일 달량이 함락되고 이덕견이 왜적에게 잡혔다. 왜적은 이덕견을 통해 서찰을 보내 군량 30섬을 요구했다. 해남 현감 변협이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전 무장 현감 이남과 힘을 합쳐 접전했으나 격파돼 이남은 죽고 변협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우도수사 김윤과 진도 군수 최린이 변협이 패한 것을 알지 못한 채 어란포에서 구원에 나섰으나 역시 패해 달량이 함락되고 말았다.
양달사 장군은 이에 “임금과 부모는 한 몸인데 어찌 예제에 얽히어 소홀하게 할 것인가”하고는 상복을 입은 채로 빈 성에 들어가니 백성들이 감복했다. 양달사 장군의 덕을 높이 사고 있던 고을 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의병을 구성한 것이다. 양달사 장군은 의병의 사표로 충효일체를 주창하며 상중임에도 구국에 앞장섰다. 형 양달수, 동생 양달해, 양달초와 더불어 장정 4천여명을 규합했다. 양달수는 형 양달사 장군과 창의해 전공을 세우고 지평을 증직 받고 정려가 내려졌다.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감사 김주가 영암에 달려와서 어찌할 줄을 모르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공은 한 도(道)의 주장으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고, 중도에 물러가서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나, 다만 장흥이 새로 격파당해 적세가 대단히 성하니, 만약 영암을 잃으면 나주 그 이상의 지역이 다 동요되어 비록 원수가 내려와도 군병이 주둔할 곳이 없을 것이다. 전주 부윤 이윤경이 장수의 지략이 있고 남원 판관 양모도 쓸 만한 재주가 있으니 급히 불러서 영암을 지키게 하면 마침내 적을 깨칠 수 있으리라”했다. 이윤경은 영암 수성장이 되자 광대 4∼500명을 뽑아 모두 채색옷을 입히고 성에 들어와 막게했다. 윤기 역시 영암읍성에 입성해 수성전에 참전했다.
조정에서는 전라도 순찰사 이준경, 우도 방어사 김경석, 좌도방어사 남치근, 경상도 순찰사 조광원, 좌도 방어사 조안국, 우도 방어사 윤선지, 충청도 방어사 장세호를 각각 임명해 왜구를 격퇴하게 했다. 이 시기 이준경이 금성에 주둔하면서 전주 부윤 이윤경에게 격문을 보내기를, “방어사가 이미 성에 들어갔으니, 가장은 돌아와 본성을 지키라” 하니, 전주 부윤 이윤경이 답하기를 “적의 움직임을 헤아리기 어렵고, 또 내가 항상 죽을 곳을 찾지 못할까 염려하였기에 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장환수는 '국난을 극복한 남도의 얼'에서 이윤경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조명했다.
‘전주 부윤 이윤경을 전라도 순찰사를 삼고 심수경, 김귀영으로 부장을 삼아 3천 병력으로 영암을 구원하게 하고 병사 조안국, 좌방어장 남치근으로 작전에 진을 쳐 적세를 관망하게 했다. 전주 부윤 이윤경이 이에 활을 잘 쏘는 궁수로 하여금 적장을 사살한 후 바람을 타 불을 질러 공격하니 적이 크게 무너져 제주도로 도망했다가 목사 김수문에게 격파당했다.’ 
전주 부윤 이윤경은 쇠뇌와 마름쇠를 길에 설치하고, 광대들을 시켜 모두 채색옷을 입고 그 위를 넘나들고 뛰놀며 재주를 부리게 하니, 적이 날개처럼 벌려 쫓아가다가 모두 걸려서 쇠뇌에 상하기도 하고 마름쇠에 상하기도 해 감히 다시 추격하지 못했다. 이덕견이 적진에서 돌아와 적의 말을 전하기를, “군량을 공급하면 물러나겠다”하니, 이덕견을 참수해 군중에 돌렸다.
영암전투에서 조구와 김희장 등이 활과 창칼을 능숙하게 다뤘는데, 활로 적을 가장 잘 죽인 사람은 조구, 김희장, 양달사 3인이 최고였다.
당시 영암읍성을 왜구가 포위해 성안의 백성들은 군량미가 떨어지고 식수가 고갈됐다. 이때 지세를 살핀 양달사 장군은 장독기로 수맥이 흐르는 곳을 가리켜 샘을 파 만들게 했다. 당시 이 샘에서 솟아나는 물로 군졸들은 갈증을 달랜 후 사기가 올라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이곳이 지금 영암읍 중앙에 있는 ‘장독천(將纛泉)’이다. 
양달사 장군은 형제와 군민을 동원해 관군과 조력하며 향토방위전을 이끈 의병의 사표로 부족함이 없었던 인물이다.
5월 24일 왜적들이 동서로 나누어 진(陣)을 짜고 몰려와 성을 포위했다. 양달사 장군은 왜구를 현혹하기 위해 진 앞에서 초랭이패 광대를 모아 채색옷을 입혀 희롱했다. 호남읍지(湖南邑誌) 등에서는 그가 광대를 모아 적을 기만했음을 알 수 있다.
‘본관이 제주이며 무과에 급제해 현감을 지냈다. 앞날이 창창했다. 상을 당해 집에 있는 중 을묘년에 왜구가 침략해 차례로 연해변 읍성을 점령하고 본군 읍성을 포위해 성이 함락됐다. 양달사 장군이 분노해 상중임에도 의병을 모았다. 또 광대를 모아 적을 희롱하게 해 적의 눈길을 돌렸다. 양달사 장군은 적이 태만한 틈을 타 공격해 대파했다. 이에 적이 분노해 병사를 규합해 추격하므로 달사가 왜병을 유인, 진흙 고랑으로 몰아 적이 질탕한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자 적을 섬멸해 평정했다. 그러나 양달사 장군은 상주의 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그 공을 원수부로 돌리고 집에 돌아와 종신토록 살았다. 지금까지도 전공을 포상을 받지 못했다. 이에 도내 유생들이 수 차례 관청에 표창을 상신했다.’
광대에 정신이 팔린 왜구를 역 고개를 넘어 일제히 공격해 혼란에 빠뜨렸다. 호남절의록에 수록된 유공자 1천463명 중 을묘의적에는 오직 영암 양달사와 흥양 백세례 등 2명만이 등재되어 있다. 여기서 양달사 장군의 향교전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적병이 고을의 북쪽에 둔을 치고 있었는데 공이 적들이 보는 앞에서 광대무리를 시켜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꽃 모자를 쓰고 온갖 유희를 벌이게 하니 적들이 이를 보고 웃고 떠들었다. 이 틈을 타 공이 용맹한 군사 수백을 이끌고 몰래 역현을 돌아 일제히 뛰쳐나가니 광대 무리들이 함께 공격했고, 성 중의 노소(老少)들이 또한 북을 치며 뒤따랐다. 이로써 대승을 거두니 죽인 자의 수효를 이루 다 셀 수 없었고, 공도 10여군데의 부상을 입었다.’
왜구들은 모두 향교에 들어가 서로 다투어 구경했다. 적장인 자는 향교 성전의 위판을 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고 누른 빛깔의 기를 든 선봉인 자는 그 기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며, 마치 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했다.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화전을 쏘아 마침 서풍이 크게 일어 화전이 빠르게 나가므로 승세를 타고 쫓아가니 왜구들이 모두 향교로 들어갔다. 조선군들은 화살을 비 오듯이 쏘자 왜구들이 기세를 잃고 무너져 도망했다. 이로 인하여 적의 머리 104급을 베고 또 패해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 6급을 더 베었다.
전라도 관찰사 김주의 장계(狀啓)에는 "영암향교에는 왜적이 떼지어 모여 있었으므로 선성 위판이 거의 다 타고 세 위가 남아 있는데 쌓여 있는 왜적의 시체와 땅에 그득한 유혈로 매우 더럽혀졌다"고 했다. 실제 남치근 등이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불시에 쳐들어가 적을 섬멸한 것이다. 나머지 잔당들은 이윤경이 김경석을 권해 군사를 출동시켜 싸워 왜구 200여급을 벤 것이다.
이어 앞쪽에서 광대들도 협공했고 성안의 백성들도 징 등을 두드리며 적의 뒤를 추격해 왜구를 무찌르는데 협력했다.
전주 부윤 이윤경 등과 연합한 영암 양달사 장군 의병 활약은 왜구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다. 왜구는 초기에 서울까지 점령하겠다고 공언했으나 이후 왜구는 5월 25일 영암향교 전투와 금교 전투를 고비로 물러갔다.
향교 전투에서 승리하고 휴식을 취하는데 2차로 적이 다시 몰려왔다. 이때 왜장은 창검을 휘두르며 공에게 일전을 걸어왔다. 이에 호남절의록은 유인전술로 적을 격파한다고 쓰고 있다.
‘병사를 모아 잠시 쉬도록 했는데 왜적들이 다시 병을 모아 추격해오니 한편 싸우며 한편 퇴각하던 중 말의 발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공은 손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잡아 끌어내어 다시 오르려는데 왜장이 칼을 던지매 공은 이를 피했으나 그만 말이 이에 맞고 거꾸러지고 말았다. 공이 급히 성에 들어가 만호 박천추의 말을 빌려 타고 적을 유인하니 적이 쫓아왔다. 공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도망치다가 금교의 진흙밭에 이르러 말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이를 지나니 적들은 뒤쫓아 오다가 과연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공은 말을 돌려 일검으로 모두 진살했다. 이어 원수의 군사들이 함께 적들을 섬멸했다.’
불꽃 튀는 대결이 수십 합이 계속되는 동안 갑옷이 찢기고 왜장은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양달사 장군은 천천히 후퇴하던 중 말이 진흙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에 양달사 장군은 손으로 말갈기 끝을 잡고 말을 진흙 속에서 끌어내어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그러나 적장이 칼을 던지므로 말이 칼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그가 추격하는 왜군을 진흙땅으로 유도한 것은 양달사 장군이 영산강 주변 지류천의 지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양달사 장군은 평소 영산강변 무심평 시종면 봉소리에 400두락의 논과 우암포(봉소리)에 1천두락의 논을 간척사업을 한 연유로 땅의 깊은 수렁골이 어디인지 잘 알았다.
양달사 장군은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 만호 박천추(萬戶 朴天樞)의 말을 빌려 타고, 왜구들을 동문 밖 영암읍 대신리 추더리(추다리 金橋) 수렁으로 유인했다. 당시 덕진만의 바닷물은 망호천과 대신리(대내: 배가 드나든 것에 연유된 마을 이름) 앞 추더리 다리를 거쳐 개신리 방아다리까지 드나들었다.
양달사 장군은 왜구들이 추격해오므로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하다가 금교의 진흙탕에 이르러 말을 끼고 번쩍 뛰어넘었다. 호남읍지에 양달사 장군은 ‘진흙 고랑으로 적을 유인해 질탕한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렸다’라고 써 있다. 양달사 장군의 계책으로 왜구들을 진흙 수렁에 빠뜨려 군사들과 섬멸한 것이다.
을묘왜변 당시 양달사 장군은 영암군민들에게 의병이 되길 권하고 그의 형제까지 의병으로 활약하게 함으로써 의병의 사표가 되기에 부족이 없었다. 공을 탐하지 않았던 그는 조선사회의 뜻있는 선비들은 공의의 표상으로 회자하기도 했다.
5월 13일 달량성 함락으로 활개를 치던 왜구들은 5월 24일 영암성을 공격했으나 양달사 장군과 영암군민의 선전으로 왜구들이 꺾이고 성안 장독샘 관정으로 음수까지 확보함으로써 의병들이 더욱 사기가 충천했다. 5월 25일 영암향교 전투와 금교 전투에서 승세를 거둠으로써 왜구들이 퇴각했다.
을묘왜변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상제를 지키고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미암 류희춘을 방문했다. 양달사 장군은 호남을 대표한 인물들과 교유하며 예제 지키기를 처음처럼 했다. “적을 섬멸한 일에 기복(起復)하여 싸움터에 나선 것은 임금의 명에 따른 것이 아닌데 이에 상을 바란다면 이는 내가 부끄러워할 일이다”고 했다. 얼마 후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자 고을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길 “우리 고을이 오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양공의 공이다”라고 했다. 양달사 장군은 훌륭한 전공을 이뤘지만 모친 상중이기에 포상을 극구 거절해 다소 조명이 더디게 됐다. 그럼에도 1842년(경종 2) 5월 20일 영암 유림 김규성 등이 상소하고 의병의 사표로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정에서는 1847년(헌종 13) 10월 19일, 양달사 장군과 형제들에 대해 양달사는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에, 형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했다. 이런 기록은 관찬서인 전남도지, 영암군지 등과 남암공사적에서도 전공을 높게 평가했다. 이 시대에 의병의 사표로 양달사 장군의 조명이 꾸준하게 진행되면서 영암군민의 역사적 정체성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됐다.
1971년 7월 10일 영암읍 장독샘 현장에 양달사 장군의 공적비를 서예가 구철우가 글씨를 쓰고 군민을 대표해 영암군수 김기회가 세웠다. 이어 1973년 8월 25일 시종면 봉소리 조등 양달사 장군의 묘소에 묘비를 세웠다. 또 1974년 6월 양달사 장군이 시묘살이를 했던 모친의 묘소 앞에 전남도지사 허련 등을 고문으로 정하고 영암군수 김연수를 위원장으로 추대해 ‘호남창의영수양달사선생순국비(湖南倡義領袖梁達泗先生殉國碑)’를 건립했다. 2019년 8월 22일 영암군은 장독샘, 도포면 시묘유적을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했다. 을묘왜변의 전란의 상황 속에서도 충효일체 사상을 실천한 양달사 장군의 의병정신은 대를 이어 계승되기에 충분하다.

■영암지역민의 의병정신 계승과 임진의병 활동
을묘왜변이 일어나고 37년이 흐른 후 다시 왜구의 후손들인 왜군들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임진년(1592, 선조25)부터 무술년(1598, 선조31)까지 7년간에 걸쳐 전개된 왜군의 조선 침략전쟁이다. 정유년(1597)의 재침략 시기를 따로 구별해 이를 ‘정유재란’으로 부르기도 한다.
영암군민들은 임진왜란에 당면하자 주저하지 않고 “내가 아니면 누가 나라를 지키겠는가”하면서 전장으로 나섰다. 충절의 정신이 대를 이어 계속된 것이다. 이로 인해 ‘호남의 충신 의사가 배출되어 줄줄이 서서 우주를 떠받친 것이야말로 방장산 1만2천봉과같다’고 했다. 그러기에 영암은 충절을 중시하는 의향(義鄕)으로 손색이 없게됐다.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영암은 의향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군사 역할뿐만 아니라 전쟁 물자와 군량을 조달했다. 임란 기간 중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병이나 관군으로 전장에 참전한 인물들 또한 이어졌다. 영암 의병들은 의병장을 중심으로 농민과 노비들로 구성해 영암 강진 장흥 등지에서 활약했다. 특히 육상이나 해상에서 주장을 따라나섰다가 전사했다. 강력한 항전으로 왜군의 영암 침략을 격퇴하거나 최소화함으로써 이후 ‘약무호남시무국가’의 역할도 담당할 수 있었다.

□ 영암성대첩기념사업 추진 방안

 지난 2019년 7월 27일 영암에서 장만채 회장을 비롯한 27명의 경향 각지의 영암 출신 인사들이 모여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1555년 을묘왜변의 호국 영웅 양달사 의병장을 기념하기 위한 양달사 현창사업의 첫 출정식이었다. 그날 치러진 모임에서 우리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군에서 역동적으로 추진하다가 중단된 양달사 현창사업을 재추진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양달사현창사업회 창립대회 준비와 회원 모집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2019년 9월 25일, 양달사 현창사업회 창립총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면서 영암이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고장임을 대내외에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장독샘과 시묘공원 정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홈페이지 개설과 영암성 대첩을 다룬 소설 「바람벽에 쓴 시」 발간, 그리고 3회에 걸친 회보 발간 등을 통해 양달사 의병장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한편, 1555년 5월 25일 양달사 의병장을 중심으로 영암군민이 단합하여 6천여 왜구를 물리친 영암성 대첩이야말로 영암군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는 데 군민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군에서 추진해 왔던 사업들의 복원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영암성 복원이나 양달사 영정 제작, 동상 건립 등의 사업은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장기적인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보니 행정에서 난색을 표했다.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을 군정의 주요 업무로 추진해 달라고 수차 건의를 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따라서 본인은 그동안 지면상으로나,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사업을 군에서 직접 추진하기를 제안하면서, 오늘 논문을 시작하려고 한다.
참고로, 조선의 4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양사언의 시집인 봉래집(1571)의 부록에는 그의 동생 양사준의 시문이 남겨져 있는데, 그중에는 1555년 5월 25일 을묘왜변 때 우도방어사 김경석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다가 영암에서의 승리를 노래한 ‘정왜대첩’이라는 시가 남아 있다. 을묘왜변 때 왜구를 물리친 큰 승리라는 뜻으로, 필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이나 행주성 대첩을 참고하여 정왜대첩을 영암성대첩이라 부르고 있다.

■ 영암성 복원 사업
필자가 그 동안 나주읍성과 병영성, 진도 금갑진성, 달량진성 등을 가보았지만, 성터 흔적이 우리 영암성보다 적었던 곳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조선 말까지 서남부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영암성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 작업을 제대로 추진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영암군에서 핵심사업을 추진하고, 양달사 현창사업회 등이 일부 소규모 사업을 분담해서 추진하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①종합적인 발굴조사 = 지금까지 영암읍성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단지 열무정 주변과 경찰서 뒤편 성곽에 대하여 2011년 영암군 소도읍 육성사업 및 달맞이공원 조성사업과 관련하여 조사한 게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암읍성에 대한 자료도 ‘영암군 소도읍 육성사업 관련 시굴조사 영암읍성(2011)’과 ‘영암군 달맞이 공원 조성 사업’과 관련한 전남문화재연구원의 ‘영암읍성 보존 및 활용방안 연구용역 보고서(2021)’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적인 길이는 2.01km. 더욱이 1915년 지적도를 만들 당시 성벽을 기준으로 삼아 서남리, 역리, 동무리 등을 구분했기 때문에, 필자가 현재의 위성지도 위에 그린 그림과 일제의 지적도를 겹쳐 보면 당시의 성곽의 윤곽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곳은 제외하고, 가능한 곳만이라도 발굴해서 영암성 보존 및 활용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②영암성 발굴 보존 및 문화재 지정 = 최우선 과제는 문화재 지정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영암군에서 영암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 1907년 7월 30일, 남대문을 헐어버린데 따른 조선인들의 반감을 잠재우고자 제1호 내각령으로 성곽을 법적으로 훼철할 수 있는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한 이등박문은 이완용 등의 위원들 찬성으로 전국의 성곽을 허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지도를 보면 지적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 전까지만 해도 성곽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7, 80년대 영암정수장 설치시부터 새마을사업, 동무지구 개발사업 등 군 주도로 영암성을 많이 훼철하였고, 최근까지도 아파트 등을 지으면서 몰지각한 업자들이 성돌을 야밤에 실어다가 외지로 빼돌리고 있다.
지난 2018년 광주전남연구원 김만호 연구위원은 영암읍성을 도시재생사업과 연계하여 “종합적인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영암군은 여전히 반응이 없다. 서둘러 영암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예산 부담이 적은 공공용지 필지부터 발굴하여 전라남도 문화재로 관리하여야 한다.
③ 주요 시설물 및 전적지 표지판 설치 = 현재 영암읍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성터 앞에 서 있는 푯말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없을뿐더러 표기도 잘못돼 있다. 일제가 객사터에 세운 영암군청에 대해 아는 군민도 거의 없고, 500년 동안 저 멀리 추자도까지 호령했던 영암 동헌의 위치마저 찾아볼 수가 없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그 많던 건물들이 왜 허물어졌고, 일제가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영암읍성을 제대로 복원할 수가 있다.
이밖에도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시 전적지 표지판이 필요하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동문 앞의 향교에 왜구가 주둔하였고, 뒷산에 매복해 있던 양달사 의병장이 5월 25일 아침에 창우대로 하여금 왜구가 주둔하던 향교 앞에서 굿판을 벌이게 하였다는 기록들이 있다. 현 영빈관 식당과 구 영암읍농협, 제일교회 주변 10여기의 민가들이 구 향교 터이자, 영암성 대첩의 승전지다.
영암여고에서 덕진다리까지의 군더리 방죽도 중요한 전적지다. 영암성 대첩이 벌어졌던 음력 5월 25일은 양력으로 6월 14일이다. 논에 물을 대느라 군더리 방죽의 물을 바닥까지 빼냈고, 양달사 의병장은 잡초에 뒤덮인 그 방죽 위로 왜구를 유인했다. 패한 척 달려가다가 뒤따라든 왜구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자, 다시 말을 돌려 왜구를 참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서 향교 앞에서는 양달사 의병장과 군민들이 어떻게 싸웠고, 군더리 방죽에서는 양달사 의병장이 패한 척 왜구를 유인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섬멸하였다는 기록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④ 남문 및 좌우 성벽 복원 = 필자가 남문복원을 고집하는 이유는 좌우로 성곽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시굴조사를 한 경찰서 뒤편의 길이가 260여 미터에 무등아파트 뒤편 교동리 387번지 일대는 최대 230미터에 달한다. 두 성곽 사이에 남문을 설치하여 보도교로 연결하면 적어도 500미터가 넘는 읍성길이 조성된다. 현재 군에서 추진하는 달맞이공원 사업을 완료하여 열무정과 경찰서 뒤편을 연결하고, 제2단계 공사로서 남문을 건립한 후 무등아파트 뒤편의 성벽과 경찰서 뒤편의 성벽을 연결한다면 실제로 성곽 위를 걸어보는 읍성길 체험을 할 수 있다. 보도교 위를 걸으면서 영암읍 시가지와 월출산의 보름달을 구경할 수 있다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영암정수장 주변과 영암읍교회 입구, 영암성당 입구, 그리고 영암 의회 건물 옆이나 주변의 건물들 틈에는 무수히 많은 읍성 성돌들이 박혀 있다. 필자가 10여 년 전에 공공자치연구원의 세미나에서 대구 동구청의 성돌모으기 운동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대구읍성을 대구의 랜드마크로 삼기 위해 성돌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서 구 도심을 활성화시켰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현재 청주시와 순천시, 포항시 흥해읍에서도 읍성 복원을 위해 성돌 모으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영암군이라고 해서 못할 게 없다. 우리 군에서도 성돌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해서 남문을 중심으로 성곽을 연결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 2001년에 약간 복원을 하였던 무등아파트 뒤편 각자성석(刻字城石)은 불에 그을린 채로 영암군의 읍성 보존 정책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상주시가 올해부터 3년간 상주읍성 복원에 120억여원을 투자하고 충남 태안군도 50억여원을 들여 읍성 복원에 나섰다. 나주는 4대 문을 이미 2018년에 복원했고, 강진 병영성과 진도 금갑진성 복원사업도 한창 진행 중이다. 영암읍에 문화재가 없다고 하는 분들을 간혹 있는데, 모두 영암읍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영암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영암읍 중심지에 있었다. 남문 성루에는 영암성 모형도도 비치해서 관광객들에게 영암성 대첩을 알리고, 복원된 영암남문과 성곽을 영암의 랜드마크로 삼아야 한다.
⑤ 영암성 대첩길 조성 =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1915년 지적도를 따라 그려놓은 성곽 그림을 보면, 영암성의 윤곽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 선형을 따라서 영암성 길을 조성했으면 한다. 원광어린이집 담벼락을 지나서 KT 앞을 지나 곧바로 영암도서관 좌측의 골목길, 그리고 영암정수장을 지나 영암성당 뒤편에서 신동아빌라와 영신아파트 사이로 내려오면 곧바로 영암공원의 현충탑으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영암군청과 영암군의회 사잇길로 내려와 영암군 주차장과 영암농협 주차장을 지나서 동성건재 옆길을 내려오면, 바로 동성건재 터가 동문 터이다. 특히 동문이 있던 그 자리는 동문 고개라 불리던 야산의 중턱이었다. 그 위에 높다랗게 서 있던 영암 동문 문루에서는 저 멀리 덕진포뿐만 아니라 도시포와 주룡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열무정으로 올라가 새로 건축된 보도교를 건너 경찰서 뒤편의 공터로 올라서면 영암성길 탐방이 마무리된다. 영암군이나 국가기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공공용지를 중심으로 가능한 곳만이라도 영암성 터를 복원해서 사람들이 탐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길이는 2킬로 남짓. 아침 저녁 산책길로 적당한 길이다. 필자가 2017년에 제안한 달맞이공원 조성사업을 마무리해서 쌍무덤처럼 갈라진 두 개의 성터를 도보교를 연결하고, 남문을 세워서 가장 형태가 많이 남은 성곽들을 하나로 연결했으면 한다.
아울러. 대첩길도 하나 조성하기를 제안한다. 을묘왜변 당시 가장 치열한 전적지였던 현 군청앞을 출발하여 영암장터길, 영암여중고 입구, 공설운동장, 궁도장 앞을 지나서 역리 로터리, 제일교회 앞을 지나오는 대첩길을 만들었으면 한다.
또한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영암성길과 대첩길 주변에 조선시대 건물들의 표지판을 설치하고, 이 모든 것을 디지털화 해서 스마트폰 앱을 통해 누구나 영암성 대첩길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그리고 영암성길과 대첩길 주변 가게들은 영암 먹거리며 관광상품들을 판매하게 하고, 열무정에는 활쏘기와 죽궁 만들기 체험 교실을 개설해서, 영암읍 시가지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진풍경을 구경하고 싶다. 군데군데 멋진 화단과 수석공원 등의 볼거리도 만들어서, 영암 시내를 전국의 관광 명소로 만들었으면 한다.

■ 영암성 대첩 기념 조례 제정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의 법적인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미 지난해 영암군에 조례안을 전달한 바 있고, 언론에도 몇 번 기고한 바 있다. 필자는 조례 제정을 이미 수년 전부터 제안했고, 금년 들어 영암군민신문에는 수차에 걸쳐 글을 써왔다. 민선 8기에는 이런 사업이 조속히 시행되기를 바란다.

■ 영암성 대첩 대제전 개최 = 조례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영암성대첩 기념 사업을 하기 위함이다. 그 중 첫 번째 사업은 바로 기념식 개최다.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 백성들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6천여 왜구를 물리쳤지만, 도원수가 의병이라는 이유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역사에 묻혀 버렸다. 당시에는 이준경, 이윤경의 서슬이 무서웠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지방자치시대이다. 영암군에서 나서서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을 널리 알렸으면 한다.
을묘왜변 당시 변협 해남현감은 왜구를 방어한 것을 기념으로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해남군에서는 지금 그 나무를 ‘해남 수성송’이라고 부르면서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 영암군도 매년 5월 25일에는 기념식을 개최하고, 세미나 개최와 각종 예술공연, 궁도대회를 비롯해 각종 체육대회와 글짓기 대회 등을 열어야 한다.
지난해 5월, 제1회 양달사의병장 궁도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코로나 19 확산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관내 궁도인들만 모여서 대회를 개최했지만, 2022년 4월 23일에는 전남 도내 9개 시군의 궁도인들이 모여 기량을 펼치고 화합을 다졌다.
하지만 국민체육진흥법 제18조에 따라 영암군체육회 등에 군비를 보조하는 과정에서 영암군체육회에서는 모든 단체에게 일률적으로 25%의 부담금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일반 체육단체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필요한 조치라고 본다.
하지만 양달사 장군 궁도대회는 체육단체의 육성이나 궁술 역량 경기라기보다 양달사 의병장의 영암성 대첩을 널리 알리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궁도대회에서의 보조금에 대해서는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 지원 조례”에 의거 부담금을 제외해 주었으면 하며, 영암성 대첩 기념조례를 제정하려는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각종 문화행사나 공연도 마찬가지다. 양달사 관련 행사를 하는 것은 영암군을 알리고, 영암성 대첩의 위상을 높이고, 종국에는 영암군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선양하는 사업이다. 동화 발간이나 뮤지컬 공연 등도 영암을 영암답게 하는 사업으로서, 군에서 발벗고 나서야 한다.
 
 ■ 양달사 현창사업
① 양달사 시묘공원 조성사업 = 시묘공원 옆에 양달사 형제의 사당을 세우고, 공원 안에 여막이며 쉼터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많은 현창사업이 추진되고 있고, 우리 군에도 낭산 김준연이나 왕인박사 사당이 있다.
하지만 영암군 역사상 영암군민에 의해 군수로 추대되어서, 군민을 위해 피를 흘린 양달사 의병장의 사당이나 추모관은 없다. 추모관은커녕 지금까지 양달사 의병장의 묘소도 방치해두다시피 했다. 이제라도 영암군에서 나서서 시묘공원을 번듯하게 정비하고, 그 옆에 사당이며 공적비를 건립해서 양달사 시묘공원을 학생들의 충효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영암군민과 함께 영암성을 지키고, 왜구를 물리친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거나 창작극으로 제작하여 홍보하게 되면, 시묘공원도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② 장독샘 주변 정비 = 장독샘은 을묘왜변 때 양달사 의병장이 성안의 군민과 병사들을 위해 파게 한 샘이다. 당시 왜구의 침입에 떨고 있던 성안 백성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한 채 기갈에 허덕이고 있었다.
1555년 5월 24일 오전, 전부부윤 이윤경, 우도방어사 김경석 등과 왜구를 물리칠 전략을 협의하려 성안에 잠입한 양달사 의병장이 한 곳을 가리키며 파보라고 했더니 물이 솟구쳤다. 그곳이 바로 현재의 장독샘으로, 1971년 영암군의 인물사를 들여다보던 김기회 영암군수는 양달사를 영암군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로 평가하고, 장독샘 앞에 손수 공적비를 세웠다. 그 후로 양복완 부군수가 일부 정비하긴 했지만, 군에서는 그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지난해 도비 사업으로 담장이며 우물 등을 일부 정비하고, 쉼터의 명칭도 오거리 쉼터에서 ‘양달사 쉼터’로 바꾸었지만, 아직도 미흡하다. 뒷편의 슬레이트 건물만이라도 사서, 그 부근에 음수대를 설치하고, 옆에는 관광객들이 발을 담그고 담소를 즐길 수 있는 도랑이라도 만들어서 주민들의 명소로 가꾸었으면 한다.
③ 선양사업 = 영암읍 중앙로는 양달사 의병장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왜구를 물리치던 곳이다. 영암읍 중앙로를 양달사로로 바꾸고, 현재 기본 설계가 마무리된 달맞이공원은 영암성 대첩 기념공원으로 바꾸었으면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초중고생들의 역사 교과서에서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성 대첩이 을묘왜변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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