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대하여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06월 21일(금) 13:07
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
미국 영암군 홍보대사
토요일 오후, 창가에 앉아 뒤뜰 감나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파리들이 가볍게 흔들리더니 감잎 하나 툭 떨어집니다. 한 자락 바람이 스쳐갔나 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은 떨어지고 머잖아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겠지요. 보이지 않는 것이, 잡히지도 않는 것이 저렇게 가만 가만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어릴 적, 구멍이 숭숭 난 바람 든 무를 깎아 먹으면서 ‘바람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바람이 나서 도망갔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과연 바람은 무엇일까 제법 심각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후로도 바람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버스통학을 하던 중학시절, 타이어가 터지자 차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신작로에 내리고 바퀴를 갈아 끼운 다음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버스를 보면서, 풍선에 넣으면 하늘에 뜨는 그 가벼운 바람이 어떻게 저처럼 천근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까 궁금해 한 적이 있습니다.
바람은 여러 가지 형상으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호수가 파르르 잔물결을 일으킬 때 물 건너가는 바람의 자취를 볼 수가 있고, 밤에 대숲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람이 어깨동무를 하며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 따라 세상이 움직인다는 느낌도 듭니다. 바람이 서늘해지면 세상은 단풍으로 물들고, 바람 끝이 차지면 사람들은 두툼한 옷을 꺼내 입습니다. 훈풍이 불어오면 어느새 나무들은 몸을 풀어 파릇파릇 새 싹을 틔웁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결국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바람’ 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가슴에 바람이 일면 제몫 이상의 일을 척척 해내는 것이 우리들 인간입니다. 봄바람은 처녀 바람이라던가, 학부모들의 치맛바람, 선거철이면 들려오는 무슨 바람도 사람들이 바람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여기까지 오다 보니, 사람은 바로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오릅니다. 아니, 사람이 바람이라니? 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그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바람입니다. 성서에도 흙으로 사람을 빚은 다음 바람(숨)을 불어넣어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구약 시편엔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람이 우리 속에 머무는 동안 인간일 수 있습니다. 바람이 내 곁을 떠나는 날, 우리는 한줌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이 바람이라면, 바람에서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게 인생이라면, 세상을 돌아다니는 바람의 얘기들을, 바람이 전해주는 말을 놓치지 않고 들어보고 싶습니다. 꽃 사이를 넘나들며 꽃가루를 날라주던 바람 중신할미의 얘기를, 메마른 사막을 홀로 달려온 그의 목쉰 소리를, 파도를 몰고 캄캄한 밤바다를 건너와 철석 처-ㄹ석 전해주는 먼 나라의 소식도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말없이 자라는 나무와 꽃과 풀, 고요히 움직이는 별과 달과 해, 그 사이를 가만가만 헤집고 다니며 바람은 그들을 어루만져줍니다. 벼랑 끝 바위틈에 서서 불평 한 마디 않고 제 자리를 지켜내는 저 나무의 얘기를, 한 여름 만개의 잎을 거느리다가 이 겨울 맨몸이 되어 혹한을 이겨내는 잎 다 진 나무들의 속 이야기를, 바람을 통해 들어보고자 합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창문이 덜컹거립니다. 바람이 내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입니다. 내 영혼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바람이 내게 전해준 말을 가만히 되새기고 있습니다. 바람과 친해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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