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잡초처럼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2013년 10월 25일(금) 15:00
2013 전국 중증장애인 배우자 수기공모 당선작
정 길 여
전남장애인협회 영암군지회
한 가정을 꾸리고 더없이 도움이 필요한 지아비를 섬긴지 어언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기막힌 인연과 인생사 시련을 짧게나마 이야기 하고 싶어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곱게 자라던 저에게 세 살 되던 해 어리디 어린 저에게 뜻하지 않는 지금까지도 아니 평생 지고 갈 아픔이 다가왔습니다.
고열과 호흡곤란 근육마비 등이 동반된 희귀한 병이었지만 부모님은 완치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시고 양약 한약 가리지 않고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쪽다리만은 하느님께서도 허락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린나이에 순탄치 않는 인생의 서막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는데 지금이야말로 이렇게 글로 적지만 엄청난 시련이었습니다.
몸이 불편해 집에서 먼 학교를 갈 꿈도 꾸지 못하고 보통의 아이들처럼 뛰어놀 수도 없고 놀림과 괄시 모든 게 저에게 쏟아지는 어려움에 더더욱 소심해지고 집밖이 두려웠습니다.
왠지 모르게 소곤소곤 거리는 주변사람들의 목소리 친구들의 놀림 어린나이엔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였습니다.
그런 누나가 안쓰러웠는지 남동생들이 자기들이 공부했던 헌책으로 한글과 사칙연산 등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뒤늦게 공부하는 저 또한 열심히 해서 책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책을 통해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작은 울타리에 갇혀있던 저에게 한줄기 희망도 그때 생겼습니다.
우연치 않게 접하게 된 성당 수녀님과 신부님이 저에 말벗이 되어주셨고 저의 말 못할 비밀을 주님께 기도드리며 회개하며 또한 그분들은 나 자신 그대로를 받아주셨기에 많은 의지를 하게 되었고 사춘기 힘든 시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제 삶도 달라지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니 좋은 생각을 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새로운 꿈도 꾸게 되었습니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게 생각되겠지만 저에겐 큰 꿈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한사람의 아내가 되어 혼자가 아닌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다가온 기회, 성당에 같이 다니시는 지인께서 맞선을 보라고 청해주셨습니다. 깔끔하게 벗어 넘긴 머리에 말끔한 옷차림을 한 남자 다부진 어깨에 세상 두려울 것 없는 사내대장부였고 실언을 하지 않는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저에게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에게 결혼해줄 수 있냐고 했습니다. 며칠 밤낮을 고민과 고민을 한 끝에 허락을 했지만 그 당시엔 단순했습니다.
그가 시계기술도 있고 먹고 사는데 아무지장이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결혼을 다짐했습니다. 그 길로 저는 남편과 시댁으로 인사드리러 갔는데 당시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다지만 식구가 10남매나 된 시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더 어려웠습니다. 겨우 월세방을 얻고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저와 남편은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생활이 나아지면서 새로운 희망, 새 생명이 저의 몸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더 조심하고 예쁘고 좋은 음식만 먹으며 열 달을 기다렸습니다. 건강한 사내아이 우렁찬 울음소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런 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행복했습니다. 2년 후 큰 아이의 동생이 생겼고 두 배의 행복이 저의 품에 들어왔습니다. 세상을 다가진 것처럼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생활도 윤택해지고 남편의 성실함에 항상 고마움을 갖고 지내던 그시기에 두 번째 시련이 차츰차츰 다가왔습니다. 뜻하지 않은 남편의 뺑소니 사고 청천 벽력같은 모든 게 한순간 무너져 내린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남편은 선물로 가방과 학용품을 사러 읍내에 나갔습니다. 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오지 않는 남편 친구들 만나면 연락이라도 올 건데 연락도 없고 불길한 예감이 저를 엄습하고 울먹이고 있던 그 순간 남편이 사고 났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늘도 무심하지 왜 나만으로도 부족해서 남편까지 이런 큰일을 당하는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모든 게 싫었습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반쯤 정신 나간 여자처럼 지내던 중 제 옆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어미 달래준다고 잡은 그 손 아이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사고 당한 당사자 남편 어리디 어린 두 자식 앞에서 너무 내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습니다. 이일로 독하게 마음먹은 계기가 됐고 10개월의 병원 치료 및 재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양쪽다리를 쓸 수 없는 우리가 말하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장애가 된 남편 말로다 표현을 못하고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며 워낙 심지가 깊고 강해서 견디지 못할 자신에게 처한 상황을 헤쳐 나갔습니다. 아이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기 아빠 엄마가 1급, 3급 장애인이 됐으니 말입니다.
내색하지도 않고 꿋꿋하게 자라준 두 아들들이 한없이 사랑스럽습니다.
저 또한 그동안 남편에게 미루던 집안일을 하나하나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과 남편을 위해 시계업을 하는 남편이라 없는 부품, 부속 시계에 필요한 온갖 기기들을 도시로 나가서 직접 사와야 했고 해보지 않은 일이기에 낯설고 불편한 다리가 걸림돌이었지만 택시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버스에 어지간한 거리는 기우뚱 기우뚱 걷고 나름대로 적응해나가면서 불편한 몸이지만 순응하며 현실에 처해있는 ‘우리가족’이라는 틈바구니 속에서 행복을 찾아갔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두 아들들은 어느덧 장성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큰아들은 결혼하여 세 아이의 아빠 저에겐 손자 손녀들이 생겼지요. 지나온 과거 힘든 역경 모두 잊고 자식들 바라보며 행복해지는 그 순간 세 번째 시련이 또 닥쳤습니다. 큰아들의 교통사고 7살, 6살, 2살을 둔 가장이 우유대리점을 하면서 피로와 과로가 겹쳤는지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났습니다. 남편을 닮아서인지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한 아들이었는데 중환자실에서 1개월 일반병실에서 3개월 치료 끝에 큰아들도 5급 장애인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왜 이런 일만 생기는 걸까?
엄청난 고통이 따랐습니다. 차라리 나에게 그 고통을 다 짊어주지 왜 아들에게 까지 흑흑흑 전생의 무슨 죄가 그리 많길래 이렇게 고통을 주는지 두려웠습니다. 이 삶이 너무 힘들기만 한데 형제애가 돈독한 두 아들 입원 치료하는 동안 작은 아들은 직장도 그만두고 3개월 동안 형 옆에서 병수발을 다했습니다. 묵묵히 지켜봐주며 힘이 되어 준 것 같습니다. 큰아들도 약간의 불편함 예전 같진 않지만 지금은 건강하고 가장 역할 충실히 하고 있으며 큰며느리에게도 말은 안했지만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수고했다고 더욱더 열심히 살라고 이번 기회를 통해서 말해주고 싶습니다.
옛날 저에게 시어머니께서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처럼 우리 며느리에게도 이리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시련과 아픔이 지나면서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하고 좌절하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우리 인생 한탄만 하면 무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남편 큰아들 큰며느리 손주 섯 작은아들 작은며느리 손주 둘 이로 인해 ‘가족이라는 울타리’ 다시 일어서고 씩씩하게 헤쳐 나가렵니다.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 가족 여러분 우리는 많은걸 내려놓고 작은 불빛이라도 우리 스스로가 행복을 만들어 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느 누가 행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꺾이지 않고 굴하지 않는 잡초처럼 사는 삶이었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서 전 행복합니다. 장애인 가족 여러분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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