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의 부적응 : 반정치 시대의 정치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
2013년 11월 29일(금) 1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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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반정치 (또는 탈정치) 시대로의 전환은 세 가지 정도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1) 하나는, 정치적 자유화와 민주화다.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의 철거는 굉장한 결정적 계기다. 독재시대의 국민적 화두와 구호는 거의 온통 정치적이었다. 거의 단일 의제, 단일 문제의식이었다. 젊은이들은 정치적 자유의 부재 현실 극복에 목숨을 걸었고, 개인적 향락에 죄의식을 느낄 만큼 강렬히 ‘사회(주의)화’ 되었다.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되면서 정치적 문제의식은 급속히 약화 또는 해체되었다. ‘정치’와 ‘이념’과 ‘운동권’은 퇴조를 맞는다. 정치과잉, 이념과잉, 운동과잉의 실효성이 상실된 거다. 반정치 시대의 ‘정치적’ 특징은 다양하고 혼재적이지만, 굳이 설명을 시도하자면, 적대적 전쟁(zero-sum war)이 아닌 공존의 게임(positive-sum game)이 새 문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일극주의에서 비정치적 다극주의로의 코드 변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념정치 대신 생활정치의 수요창출이 일어났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학생운동 방식의 변화이다. 고도로 정치화되어 정권퇴진과 독재타도를 주업무로 하던 학생운동이 등록금, 학생복지, 청년실업 문제 등 ‘시대에 맞는 학생 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정치적 거대담론에서 일상적 삶에 관한 생활담론으로 전환된 거다.
2) 둘째는, 경제적 토대 (또는 하부구조)의 급변이다. 정치(과잉) 시대(독재시절)의 1인당 GDP는 고작 몇백 달러에서 3~4천 달러 수준이었다. 1987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거치며 경제가 도약(take-off)한다. 지금, 우리는 2만 3천 달러에서 구매력 기준 3만 3천 달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식주에 있어서 궁핍의 시대에서 풍요의 시대로 전환했다. 하부구조의 성격과 질의 변화 방향에 정치를 포함한 비경제 부문들로 구성되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 역시 규정되고 종속 변화했다. 전래적 정치 의제의 지배력이 사실상 소멸되고, 정치 의제 자체의 비정치화 (또는 탈정치화)가 진행되고 있다. 비타협적 노조의 장악력도 급전직하했다.
물질집착적 시대로부터 탈물질주의(post-materialism)로의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 일어났다. 경제의 비약적 성장은 우리들의 모든 면을, 조용했을진 몰라도, 철두철미 변화시켰다. 찬반을 떠나, 신자유주의와 글로벌 스탠더드가 상용어로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것도 상호작용하며, 토대와 상부구조의 성격이 바뀌었고, 계속 바뀌고 있다.
3) 셋째는, 모더니즘의 가치체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이 있었다. 포스트모더니티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다원적 지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원주의로부터 다원주의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유일 ‘이성’이 제시하는 단일가치가 힘을 잃고, 경쟁하는 가치들이 다원적으로 승인되고, 이성적임과 비이성적임이 공존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단 하나 정답’에서 ‘다수 정답들’로의 패러다임 변화(paradigm shift)가 일어났다.
다수도 다수들이 되고, 소수도 다양한 소수들이 되었다. 인종, 성, 종교, 환경, 문화와 예술 등 사회 전 영역에서 주류와 비주류가 교대되거나 착종하고 있다. 공존과 관용이 필수 덕목이 된 것이다. 상대 존재의 인정(또는 존중)이 제1표준이 되었다.
Ⅲ. 물론, 위에 말한 변화들은 1987년이라는 시점을 임의적으로 기점화해서 설명하고 있다. 대체로 87년을 한 기점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편의하고, 유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와 같은 전환의 기점을 서구 선진민주국가에서는 1960년대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보다 약 2~30년 뒤에 이 같은 변화가 발생한 셈이다.
어쨌든, 87년 이전의 패러다임과 그 이후 패러다임은 전혀 다르다. 87년 이전 시대를 ‘천동설’이라는 패러다임이라면, 지금 우리는 ‘지동설’ 패러다임에 살고 있는 거다. 지동설 시대에는 천동설에 입각한 교리와 설명과 상식과 가치관과 문법과 교과서는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된다. 천동설 시대의 단어들은 지동설 시대를 전혀 설득할 수 없다.
Ⅳ. 문제는, 유독 한국정치의 주도세력들이 위의 이러한 상전벽해적 변화에 전혀 조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은 크게 변했는데, 정치주도층은 거의 그대로인 형국이다. 정치 자체의 위상과 비중이 가벼워지고 낮아졌다는 점 위에, 정치권이 시대변화에 유연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거나 적응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치의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는 거다.
국회와 국회의원(law-maker)들이 상시적으로 위법과 위헌을 일삼고 있는 오늘의 한국정치 문제는 ‘오늘의 관점’에서 결코 가볍지도 용납될 수도 없다. 더구나 이 일의 심각성에서 대해서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 법치국가의 일반시민들이 그 정치를 개탄하고, 불신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여의도 정치사회의 정치적 결과물(output)과 일반시민 사회의 기대수준(이랄까 만족수준)사이의 간격은 이미 인내의 한계점을 한참 지났다.
지금 한국의 여의도 정치는 완전 국민 눈 밖에 났다. 어느 모로 보나, 여의도 정치는 한국 발전의 최악의 장애물이다.
정치권이 국민의 애물단지가 된 것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지체(political lag) 때문이다. 교육수준과 경제수준의 향상, 그리고 인터넷과 세계화의 영향에 힘입은 국민들은 벌써 ‘바람 풍’을 말하는데, 정치권은 여태 ‘바담 풍’을 말하고 있는 격이다. 국민들은 당론, 정쟁, 특권, 정당공천, 초법, 불통, 권위주의, (극한)투쟁, 폭력, 욕설과 비방... 이런 정치(과잉) 시대의 유습에 넌더리를 내고 있는데도, 정치권은 자기 관성으로 마이동풍이다.
정치권에는 천동설 신봉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정치(과잉) 시대의 사고방식과 행동유형에 여태 젖어있는 국회의원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새누리당보다 민주당이 더 심각한 것이 사실이지만, 크게 보면, 그저 피장파장이다. 새누리당의 극단적 강경파 보수정객과 민주당의 극단적 강경파 진보정객들은 물레방아를 이미 흘러간 물로 돌리려는 사람들이다.
내가 속해있는 민주당을 놓고 들여다보면, 김대중과 노무현만 존경할뿐, 이승만과 박정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의원들이 상당수다. 산업화세력을 용인하지도, 그들의 애국심을 승인하지도 않는다. 작금의 여야 대치상황에서 새누리당을 향해 내뱉는 어휘와 발휘되는 반응은 토벌해야할 적대세력에 대한 것 그대로라는 느낌을 받게 한다. 사생결단으로 임하는 민주당 강경파의 비장미로 국회가 물들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본회의장 입장시 새누리당이 과거 그랬던 것에 대한 보복인 양, 이명박과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시 그들을 국가 원수로 예우할 용의가 없던 이들이 민주당의 다수였다. 지난 대선 결과에도 감정적 불복심리가 만만치 않다. 상대방의 과오와 실책에 대한 관용을 기대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한번 양보하고 다음에 양보 받겠다는 타협정치(log-rolling)에 대한 거부감도 팽배하다.
이것이 강경과 강경, 강 대 강의 실상이자 진면목이다. 문제는, 반(또는 탈)정치 시대가, 그리고 이 시대의 국민들이, 이를 이해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한다는데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구태의연한 정치(과잉) 시대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연거푸 패배하고,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했다는 것은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 더 구태의연했다는 증거이다. 세계적 선진국 수준의 정치를 간접경험하고 기대하는 시민들에게 정치(과잉)시대의 구태의연함으로 응답하는 민주당에게 던지는 민심의 싸늘한 회초리였던 셈이다.
Ⅴ. 지금 한국 정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새 가치관과 기대와 교양과 상식과 패러다임에 기초해 있다. 반정치 시대의 시민들은 정치가 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도 다른 부문만큼 근사하고 세련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고 요구하고 있다. 이전투구의 난타전을 벌이는 정치(과잉) 시대의 행태를 경멸하거나 질타한다.
이제 그럴 이유도 필요도 사라졌다는 것이 그 인식의 기조다. 정치(과잉) 시대에는 시위를 하면 지나가던 택시들이 전조등을 깜박이거나 경적을 울리면서 호응하고 지지했었다. 지금은 지나가는 차량마다 혀를 차며 욕설을 퍼붓는다.
시대가 바뀌면서 국민들이 바뀐 것이다. 국민들이 바뀌면서 시대가 바뀐 것이다. 이 국민적 바뀜을 한탄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국민들은 이 한탄하는 이들을 개탄한다. 지금 우리시대의 유권자들은 보수 강경파와 진보 강경파의 돈키호테들이 벌이는 세기적 소극(笑劇)을 보며 고개를 돌리고 있다. 고개를 돌리고 있는, 바뀌어버린 시민들이 문제인가, 아니면 바뀐 시민들로 하여금 고개를 돌리게 하는 우리들의 부적응이 문제인가. <2013년11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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