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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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풍경

정찬열 군서면 도장리 출신미국 영암홍보대사

이곳 오렌지카운티 어떤 식당에 갔더니 벽에 바가지가 여럿 걸려 있었다. 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오랜만에 보면서 고향집에 온 듯 포근했다.
박 넝쿨이 울타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던 풍경, 보름달 아래 둥그렇게 박이 익어가던 모습, 어머니가 바가지로 솥 밑바닥을 훑어낼 때 들리던 그 보드라운 소리도 귓전을 통해 들려오는 듯 했다.
바가지를 보면 피어오르는 모습이 있다. 초등학교 3,4학년쯤의 일이다. 100여 가구 되는 우리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 샘물을 길러다 먹었다. 물을 길어오는 일은 주로 어머니나 누나들의 몫이었다. 물동이는 물을 나르는 중요한 도구였다.
누님은 샘에서 동이에 남실남실 물을 퍼 담은 다음 물이 출렁거려 넘치지 않도록 바가지를 물동이에 엎어 띄웠다. 고개를 뒤로 젖혀 긴 머리채를 흔들어 손으로 싸매어 뒤로 모은 다음 머리 위에 또아리를 얹어 얼굴 앞으로 내려온 끈을 입술로 지긋이 물었다. 그리고 물동이를 이었다. 한 손으로 물동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물동이 가상자리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쭉 훑어내어 흩뿌리며 걸어가는 누나의 모습. 석양에 긴 그림자를 만들며 물동이를 이고 잰 거름을 걷는 누나들의 자태를 보면서 어린 내 가슴은 쿵쿵 뛰었다. 누나가 걸을 때마다 바가지는 물동이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투둥 툭 소리를 냈다.
어느 날, 동네 형이 자그마한 쪽지를 주며 물동이를 이고 오는 누나를 가리키며 전해달라고 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아무개 형이 전해달라고 하더라며 그 누나에게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아, 그 편지를 받은 순간 발갛게 달아오르던 누나의 얼굴, 그리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 누나의 표정이라니.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나는 얼떨떨하고 미안했다. 심부름을 잘 못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한 동안 안절부절 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어 진학을 못하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또래 동네 아가씨가 나를 만나면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물동이를 이고 오는 그녀와 고삿길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하나 비켜 가기도 어려운 좁은 길이었다. 홍당무가 된 얼굴, 어쩔줄 몰라 하던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어릴 적 편지를 전해 주었던 그 누나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어쩌면 그때 그 누나의 표정과 저렇게 비슷할 수 있을까. 내 시선을 애써 피하며 바삐 걸어가는 그녀의 물동이에서 투둥 툭 투두둥 툭, 바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날 저녁, 동네 뒷산에 있는 김씨네 산소 앞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했다. 이를테면 첫 데이트였다. 동네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려는데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어둠이 깔리는 시각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날따라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묘 앞 상석의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대화는커녕 무슨 말인가 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어주지가 않았다.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또렷했다. 눈보라치는 캄캄한 밤, 찬 돌 위에 앉아 오돌오돌 한 참을 떨며 앉아 있다가, 그냥 돌아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느라 마을을 떠나면서 갑돌이와 갑순이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그 날 저녁 풍경을 떠 올리면 잔잔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 식당의 바가지가 오랫동안 벽에 걸려있어, 가난했지만 정답고 사랑스러웠던 고향의 아련한 추억들을 사람들에게 되살려 주었으면 좋겠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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