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 채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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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채용에 대한 역사적 고찰(3)

이민족인 몽고를 몰아내고 건국한 명도 송 대의 과거제도를 부활하였다. 중국에 있어서는 학교교육과 과거는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어 왔다. 명대의 과거는 송 대와 같이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와, 중앙에서 시행되는 회시, 그리고 황제가 친히 시험 보는 전시의 3단계로 실시되었다. 명대의 과거는 외면상 송 대와 비슷하나 실상은 많이 달랐다. 먼저 향시 응시자는 지방학교출신자로서 생원의 자격을 가지고 학교성적이 우수해야 했다. 이는 명대의 과거제도가 학교교육과 밀접하게 견인되어 과거와 교육이 유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학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생원이 된다. 송 대에는 생원이 1회에 한하여 2차 과거 응시자격을 주었으나, 명대에는 향시 합격자인 거인이나 회시합격자인 진사 그리고 향시 합격자인 생원 모두 함번 합격하년 평생 동안 그 자격을 지니게 되어 신사계층을 대량 양산하면서 이들 신사가 정치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명대의 과거 시험에는 반드시 팔고문(八股文)으로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본래 중국의 과거는 시부로 행하는 진사과였으나 명대의 복고적 문화경향은 과거시험을 유교의 경전만으로 보아, 이는 명대의 특색이라 하겠다. 그래서 명대의 과거 시험은 사서 즉 논어, 맹자, 대학, 중용과 5경 즉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에 국한하였고 반드시 팔고문으로 답안을 작성해야 했다. 팔고문은 형식이 까다롭고 엄격하여 자유로운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을 제약하여 수험자들은 창의적 노력보다는 팔고문의 형식을 익히는데 몰두하였고, 답안지는 글자 수까지 엄격하게 제한하여 학문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요즘도 자주 문제로 거론되는 암기위주의 교육방식 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혹자는 팔고문이 진시황의 분서개유처럼 명대 문화에 폐해를 끼쳤다고 혹평하기도 하는데, 역사적으로 명대에는 양명학을 제외하고는 훌륭한 학자나 문인이 배출되지 못함은 창의력을 제한한 팔고문 때문이라고 하겠다.
명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인 만주족이 건국한 청대에도 한민족의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과거제도는 면면이 이어져 청 말의 1904년에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어 중국역사문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중국의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인재등용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영국의 고등문관시험도 중국과거제를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에도 선출직과 엽관제를 제외한 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모두 과거제도의 변형이라 할 수 있어 과거제도는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그래도 공정한 방법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의 인재 등용은 삼국시대까지는 왕족과 왕비족 그리고 부족장 출신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는 엄격한 골품제도에 의하여 인재가 등용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경전을 가르쳐 유학이 발달하였다. 이에 원성왕 4년 서기 788년에 국학에 관리 채용시험 제도인 독서3품과를 설치하였다. 이는 독서의 성격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인재를 등용한 것이었다. 원래 독서3품과는 골품위주의 관리 등용보다 유학의 교양에 따라 능력위주의 인재등용제도를 마련하려는 것이었지만 강고한 골품제도가 유지되어온 신라에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식을 갖추었으나 골품으로 사회진출에 장애를 받은 6두품 출신들의 불만은 지방호족과 연합하여 신라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신라 멸망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공평한 인재채용이 사회통합의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하겠다. 그리하여 왜 인사가 만사란 말이 인구에 회자 되는지, 오늘날에도 유효한 명제인지 알 수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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