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듯이 사마천은 이른바 이릉(李陵)의 화(禍)로 치욕스런 궁형을 받은 사람이다.
궁형이란 고환을 포함한 생식기를 전체를 제거하는 형벌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이유는 한 나라 장수였던 이릉이 겨우 5천의 병사를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러 북방 깊숙이 들어갔다가 결국 패배하고 투항하여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한 조정의 모든 관료가 이릉을 비난하였으나 사마천은 오히려 변호하고 나섰고, 이는 한 무제의 처남인 당시 군권의 실력자 이광리를 비난하는 것으로 전개되어 결국에는 무제 자신을 비난하는 것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형벌에 있어서 사마천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죽음을 선택하거나, 50만전이란 거금을 속전으로 대신하거나, 궁형을 그대로 받는 것이었는데 가난한 사마천은 그만한 거금이 없었다. 당시의 선비들은 이런 경우 궁형이란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마천도 본래 자살하려 하였지만, 사관이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황제가 태산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봉선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병을 얻어 죽으면서 사마천에게 자신이 뒤를 이어 훌륭한 사관이 되라는 유언과, 자신이 사관으로서 숙원이었던 역사서를 저술하기 위해 스스로 궁형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치욕스러운 울분 속에서 발분하여 13년 만에 총 52 여 만자에 달하는 불후의 대작 사기를 완성하였다.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곧 자살하려 했으나 하나뿐인 외동딸이 아직 출가하지 못해 미루다, 딸을 출가시키고 자살하여 파란만장하면서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의 역작을 훼손할까 우려하여 산속에 숨겨두었는데 그의 외손인 양운이 조정에 바쳐 세상에 알려지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마천이 죽음 대신에 치욕스런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이용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궁형을 대신 할 자기의 죽음은 구우일모(九牛一毛)처럼 하찮은 죽음이 될 수 있다며 당장은 구차하지만 이를 참고 자기가 못다 한 일을 끝내기로 하여 태산보다도 무거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한 인간의 울분과 고뇌에 찬 선택으로 우리는 오늘날 사기란 위대한 저작물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종이도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에 나무와 대나무를 쪼개고 깎은 죽간과 목간에 이 방대한 저작을 남긴 한 인간의 치열한 삶을,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파란만장한 그 시대를 살다간 영웅호걸들의 삶을 !!!!
여하튼 사기는 한번쯤은 읽어야 하는 서적이기에 독자 여러분에게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