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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0월 29일) 저녁 연대 알렌관에서 한국문제연구회 창립 50주년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모교 교정에 들어서니 불현듯 대학시절의 온갖 일들이 머리 속에 온갖 상념들을 일으키며 떠올랐습니다. 가슴 한 구석을 아리는 것 같은 어떤 느낌에 문득 발걸음을 멈춰 보았습니다. 그리움이었습니다. 아래 글은 창립 50주년 기념 문집(자료집)에 실린 보잘 것 없는 제 글입니다. 시간되시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젊은 날의 이상을 지키기 위한 한 사람의 힘겨운 고투를 잠깐 엿보실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1973년 입학해서 입대 휴학할 때까지 내 대학생활 3년은 광복관과 성암관에서 이루어졌다. 정법대학이 들어있던 광복관은 나와 친구들의 주무대였다. 모든 수업을 여기서 수강했다. 특히 107호 계단 강의실은 학회와 토론의 아고라였다. 성암관에는 한국문제연구회의 후신 동곳회 사무실이 있었다. 수업이 끝난 오후 시간 나의 캠퍼스 거처는 성암관 지하 사무실이었다. 김영준, 송무호 등 여러 서클 선배들과 친구들이 시대를 앓던 공간이었다. 동곳회 연구부장인가 연구위원인가를 맡아 열심히 드나들었다.
대학에 들어와보니 모두가 반체제 인사들이고 반정부 활동가들이었다. 광복관의 용자(勇者)들과 성암관 지하의 투사들은 자유와 민주와 진실의 결핍에 대한 분노와 좌절과 항거를 거칠게 분출하고 있었다. 수강은 선택이고, 데모가 전공이던 시대였다.
아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대학 시절 내내 뇌리를 지배하고 있던 강박관념이었고 숙제였다. “공부만 해야 한다, 면학의 밀실로 들어앉아야 한다”는 나와 “그럴 순 없다, 어찌 이 불의한 광장의 현실에 타협할 수 있단 말인가”하는 또 다른 내가 씨름하고 격돌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는 소박한 꿈과 비인간적 시대의 모순을 외면할 순 없다는 웅대한 의기가 팽팽하게 대치하였다. 이 노선 투쟁과 갈등은 휴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수업을 듣고 있을 때는 저항과 데모를 꿈꾸었고, 이념과 데모를 도모하면서는 공부와 학점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보니 내 대학 3년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공부도 안 되었고, 데모도 안 되었다. 학점도 그저 그렇고, 서클활동도 그저 그랬다. 기대상승과 기대좌절이 충돌하고, 현실과 미래가 대립하며, 나와 또 다른 내가 맞서며 부딪쳤다. 혼돈이고 혼란이었다. 모름지기 이 길로 가야 한다는 정(正)과 저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반(反) 사이의 창조적 합(合)으로 개벽되지 못한 미완의 나는 쓰러지고, 뒹굴고, 일어나고, 수습하고, 다시 비틀거렸다. 내 생에 그처럼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무기력하고, 격정적이며, 격렬했던 극단적 모순의 시절이 달리 없었다.
결국, 나는 군 복무중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육군교도소에서 1년을 복역하게 되었다. 질풍노도의 내 학창시절은 남한산성의 좁디 좁은 감방으로 비로소 창조적 고통(creative suffering)의 변증법적 정점에 도달했달까. 내 자신이 무화(無化)되고 전면 부정되는 파멸적 벼랑 끝에서 ‘교통정리’를 보게 되었다. 사적인 목표가 차압되면서 공적 비전(public vision)이 확보되는 것이었다. 싸우되 싸우지 않는 싸움의 길이었다.
타계한 소설가 최인호의 마지막 글들 속에 “아아, 나는 돌아가고 싶다.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 싶다.”라는 구절이 가슴 아렸지만, 우리는 20대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그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순 있다. 이게 아마 ‘불멸의 비결’일지 모른다. 몸은 비록 온갖 먼지로 뒤덮여 더럽혀졌지만, 백양로와 광복관과 성암관과 육군교도소에서 눈물 흘리며 다짐했던 그 순정을 기억하여 유지할 수만 있다면 시간의 포로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
강진군수 시절 나는 우리끼리 싸우는 대신 강진의 가난과 싸우자고, 우리 힘으로 가난이라는 난적을 섬멸하고 말자고 호소했다. 생각의 낙후가 경제의 낙후를 가져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정직해야 한다는, 친절해야 한다는,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그 생각이 부족하고 낙후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경제적 가난이 있는 거라고 설득하려 했다. 정직한 영농(營農), 정직한 영업, 정직한 관광을 제시했다.
여의도에 들어와서도 이단아처럼 외치고 있다. 국회가 기준이 아니라 국민이 유일 척도라고 부르짖는다. 국회의원이 헌법기관의 벼슬아치여선 조국에 희망이 없다, 국회의원은 모름지기 서비스기관의 공익요원이어야 한다, 모든 특권과 기득권을 하나씩 그리고 남김없이 내려놓을 때 비로소 국민과 정치가 화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좌우명이 있다. 내 좌우명은 국민이다. 광복관과 성암관과 육군교도소가 나를 이 좌우명으로 이끌었다고 믿고 있다. 지금 나는 광복관과 성암관 그 시절처럼 다시 살아보는 것이다.(2013년10월30일)
절제의 정치
오늘 아침 9시부터 3시간 동안 민주당 의원총회가 있었습니다. 사회를 본 부좌현 의원이 그러는데, 무려 17명의 의원들이 발언했다 합니다. 저도 발언했습니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처칠은 정치를 전쟁과 같다고 했다. 전쟁과 정치는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한 가지 서로 다른 것은, 전쟁에서는 한 번 죽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나는 처칠의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정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켜보는 심판관 또는 평가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다. 전쟁에는 없지만, 정치에는 심판 또는 평가자(국민 또는 유권자)가 있다. 그래서, 전쟁과 달리, 정치는 죽고 살기로 하지 못한다. ‘남’(심판)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죽이고 싶어도 감정을 억제하는 거고, 온갖 욕설을 퍼붓고 싶어도 절제해야 하는 것이 정치다. 전쟁과 달리, 정치는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를 두고 벌이는 아트(art)다.
전 세계에서 대성통곡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슬픔이 극에 이를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저앉아 벽이나 땅바닥을 치거나 물건을 내던지며 발 뻗고 대성통곡한다. 이처럼 자기 감정의 여과와 억제 없이 원색 그대로 표출하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다는 글이었다.
‘절제의 미학’은 모든 상품, 제품, 예술의 기본 조건이다. 감정이 과잉되어 형용사가 남발하는 글은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고래고래 소리만 지른다고 해서 훌륭한 웅변일 수 없다. 살인의 장면을 영화로 찍을 때 그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식이어선 흥행에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살인 장면은 보여주지 않으면서 핏방울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장면을 보여줄 때 관객을 더 섬뜩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 민주당이라는 ‘상품’ 또는 ‘제품’이 소비자(고객, 즉 국민 유권자)로부터 호응을 받는 좋은 제품이 되려면, 슬픔과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표출되어선 안 된다.
조금 전 박근혜 대통령을 “부정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이라고 주장한 의원님도 계셨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이번 대선에서 국가기관에 의한 천인공노할 부정한 선거개입 행위가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과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주장은 사실관계에 있어서 비약하고 있다.
오는 18일 박대통령이 국회에 와서 시정연설하게 되어 있다. 우리 감정만 생각한다면, 불참해버릴 수도 있고 야유를 보낼 수도 있다. 남의 눈을 엄중히 의식해야 한다. 의젓했으면 좋겠다.
연말 예산안과 연계 투쟁하자는 얘기들도 있지만, ‘비예산적 쟁점’을 예산 문제와 연계하자는 것은 일반 국민들의 관점에서 설득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본다. 절제와 여과의 정치에 대한 필요가 다시 강조되었으면 한다.”(2013년11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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