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미암면 출신
누구나 ‘영암’하면 월출산을 떠올린다. 영암은 몰라도 월출산은 안다. 왕인 박사와 도선 국사는 알아도 그분들이 영암 출신임은 잘 모른다. 영암은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고, 크게 내세울 만한 게 없다는 반증이다. 나주시 끝머리인 세지면에서 영암군 들머리인 신북면에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입간판이 하나 있다. “가야금산조의 발상지 영암입니다.” 참 좋은 아이디어인데 좀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
흔히 21세기를 일컬어 ‘문화의 시대’, ‘지식산업의 시대’라고 한다. “나는 우리가 군사력으로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김구 선생은 1928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백범일지’에서 인류 미래를 통찰하여 ‘문화국가’를 역설한 선각자이다. 김구 선생이 뛰어나고 위대한 것은 올곧은 정신과 투철한 독립운동에만 있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본 혜안이라고 본다.
영암읍 회문리 출신인 악성 김창조 선생은 김구 선생과 같은 시대 인물이지만 김구 선생보다 40여 년 먼저 문화국가의 주춧돌을 놓아 국악을 현대화시킨 선구자이자 ‘현대 국악의 아버지’이다. 역사적으로 거문고의 왕산악, 가야금의 우륵, 방아타령의 백결 선생을 악성으로 부른다. 김창조 선생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랑스러운 한국 4대 악성이다.
선생이 1894년에 ‘가야금산조’를 창조한 것은 오늘날로 보면 K-팝에 버금가는 새로운 문화적 콘텐츠이다. 가야금산조가 나옴으로써 해금, 거문고, 아쟁, 피리, 대금 등 국악 전반에 걸친 산조 열풍을 확산시켜 국악의 저변 확대와 더불어 국악을 현대화한 것이다. 아악(雅樂)과 정악(正樂) 중심이었던 국악에 산조(散調)라는 새로운 양식이 더해짐으로써 국악은 다양성을 갖추고 대중화에 이바지하게 된다.
선생으로 비롯된 가야금산조는 최옥산류, 강태홍류, 정남희류, 김병호류, 김죽파류, 성금연류 등 많은 유파가 나와 가야금 전성시대를 구가하며 전승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선생의 손녀인 김죽파 선생과 김병호 선생은 영암 출신들이다. 이분들을 빼고 나면 영암 출신으로는 뛰어난 가야금 명인이 없어 명맥이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악성 김창조 선생 현창사업이 중요한 것은 김창조 선생, 김병호 선생, 김죽파 선생을 뒤이을 만한 영암 출신의 뛰어난 가야금 명인들이 배출 되어야 함이다. 김창조 선생 생가가 복원 되었고, 가야금 전수관이 세워진 만큼 후진 양성에 힘 모아야 할 때이다. 영암군 유치원생과 초중등학생들에게 전수관을 무료로 개방하여 가야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소질을 발견해내어 그 가운데 뛰어난 학생들의 소질을 계발하여 양성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영암이 모든 가야금 연주자들이 한 번쯤 와서 머무르며 김창조 선생의 예술혼을 배우며 기량을 갈고 닦는 터전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된다면 영암은 머지않아 ‘가야금의 성지’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영암이 문화예술의 군으로 거듭나고, 관광과 연계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버팀목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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