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갑사 사적(事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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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사적(事蹟)

이영현 영암학회 회장 소설가
지난 11월 17일 필자는 이곳에 쓴 '하늘 아래 첫 부처님의 집'이라는 글에서, '영암지도갑사사적(靈巖地道岬寺事蹟)'을 1663년 북명자(北溟子)가 쓴 것으로 소개했는데, 이것은 잘못되었다. 북명자가 발문을 쓴 것이지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발문을"이라고 하는 세 글자가 탈락된 것을 몰랐었기에 깊이 사과드리면서,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영암지도갑사사적을 자세히 말씀 드리면서 현재 영암군에서 추진 중인 '지명유래연구 용역'과 관련한 글로 매듭짓도록 하겠다.
영암지도갑사사적은 도갑사 등의 지명 유래와 도선국사의 탄생 설화 등이 적힌 일종의 영암군 역사서다.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사적기는 2002년에 서강대 조범환 교수가 <穢土(예토)에서 淨土(정토)로>라는 책자에서 도선국사 관련 부분만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고, 이번에는 필자가 실력이 크게 부족하지만 번역을 마무리하여 도갑사 측에 전달해 드렸다.
책의 내용은 이렇다. 표지 포함 총 24쪽인 이 책의 첫장에는 우리 영암의 월출산의 지명 유래가 다섯 가지 나온다. 월지국에서 온 문수대사가 거주하였기에 월출산, 용암사를 세운 보도존자가 금돼지를 타고 다녀서 금저산(金猪山), 이밖에도 화개산, 천불산, 지제산(支提山) 등 5개나 되는 월출산 명칭을 비롯해 영암의 중요 지명 12개 정도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다. 문수보살이 서해안으로 들어올 때 붉은 용이 안내하였다 하여 주룡포(朱龍浦), 문수보살이 개설한 암자를 문수암, 도선국사가 그것을 고쳐 머물렀기에 도갑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이 책자 중 3할은 도선국사의 출생 비화를 소개하고 있다. 조범환 교수는 도선국사 어머니의 "성은 온씨"라고 번역하였는데, "모온(母?)"에 대한 이 해석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온(?)'은 흔히 우리들이 사용하는 '님'처럼 어머니에게 습관적으로 붙이는 글자다. '어머님은'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도선국사의 어머니의 성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옥룡사증시(贈諡)선각국사비에서 언급한 신라김씨, 우리 영암의 전설과 도선국사비에서 말하는 최씨, 대략 이 두 가지로 보면 될 것이다.
그 다음 대목도 흥미롭다. 흔히들 버려진 도선국사를 비둘기가 와서 키웠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에는 학도 함께 날아와 돌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아이가 안쓰러워서 다시 집에 데려가 키우려고 할 때 갑자기 포수가 등장하여 비둘기를 쏜다. 그 비둘기가 화살을 피해 내려앉은 곳을 구림이라 하고, 학이 도망가서 머문 산은 가학산이라고 하였다. 이밖에도 덕진포, 탈천(奪川), 용암사, 구정봉 등의 지명 유래가 실려 있다.
이제 이 책의 저자를 이야기할 차례다. 이 책의 발문을 쓴 북명자에 의하면 도갑사의 장로(長老) 각명(覺名) 스님이 이 책을 주면서 목판에 새기려 하니 발문을 써 달라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 참고로 각명은 1653년 도선수미비 건립시 도갑사의 첨지판자(僉知判事)였다. 지난 9월 1일 소개한 도선국사답산기(道詵國師踏山記)를 근거로 이세익 영암군수가 1665년 10월 15일부터 10월 16일까지 전 군민을 동원하여 영암의 막힌 지맥을 뚫은 '영암보익사적(靈巖補益事蹟)' 공사를 할 때는 도갑사의 승려들을 데리고 와서 작업을 지휘한 동지(同知) 스님이었다. 여기에서 첨지나 동지는 모두 주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명 스님이 1653년 도선수미비를 건립하고 나서 틈틈이 조금씩 정리해 두었다가 1663년 북명자가 도갑사에 놀러갔을 즈음에 발문을 부탁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책자의 저자는 각명으로 봐야 한다. 발문을 쓴 북명자는 우연히 남해안에 놀러왔다가 도갑사에서 하룻밤 묵게 된 인물로, 어떤 인물인지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현재 영암군에서 영암군 지명유래 연구 용역이 진행 중인데, 영암의 지명 연구를 제대로 시작하려면, 도선국사의 숨결이 담긴 도선국사답산기와 영암지도갑사사적부터 읽어 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지명 연구가 출발점부터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아울러 '월나(月奈)'라는 지명이 향찰식 표기에서 본래의 한자 의미로 변천되는 과정도 역사적, 국어학적으로 재구(再構)해 내야 한다. 특히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월나'를 '영암'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음에도 773년이나 지난 어느 날 신증동국여지승람 자료 제출시 영암군에서 영암이란 지명이 동석(動石)에서 비롯되었다고 갑자기 적어 올리게 된 배경도 밝혀내야 한다. 영암읍 지명과 깊은 관계가 있는 영암성 시설 배치와 훼철 과정, 그리고 지난 해 10월 22일 '영암군 지명조사에 바란다'란 글에서도 필자가 언급하였듯이 일제 강점기 읍면 폐합과 새로운 지명 결정시 각 읍면에서 총독부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아직까지도 대부분 잘못 알고 있는 각 읍면 연혁과 지명 유래도 차제에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이틀이 지나면 새해가 시작된다. 아무쪼록 새해에는 영암의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이 좀더 확장되기를 고대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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