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에 대한 또 다른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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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에 대한 또 다른 시각

고대 왜(倭)의 위치를 중심으로

더욱이 광개토대왕 비문의 논란의 중심인 이른바 신묘년(서기 391) 기록을 보면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파하고, 00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00新羅以爲臣民)’의 비문을 만약 필자의 주장처럼 왜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면 ‘바다를 건너와서(渡海)’의 구절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이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일본의 비문 조작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渡海의 글자가 유난히 선명하다는 주장은 차치하고 신묘년 당시의 4세기 후반에는 일본이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 한·중·일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즉 그 시기에는 일본열도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공격할 만한 정치세력이 일본열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역사학계의 일반적 견해인바, 이때(신묘년 서기391)의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왜는 한반도 내에 있는 정치세력이고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의 개입으로 급격히 세력이 약화된 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근거지를 포기하고 일본 규슈지방으로 쫓겨 간 것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
일본은 3세기경 규슈지방에 처음으로 정치세력이 형성되었고 4세기경 규슈의 정치세력이 일본의 중앙으로 진출하여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밀려난 왜의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의 선진기술로 이룩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후 백제의 멸망으로 백제유민이 일본열도로 대거 이주하여 일본의 텐표 (天平)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우리나라 현존 최고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왜의 기록이 자주 나오는데 30여 차례 신라를 침략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그 당시 일본열도에는 통일된 정권이 형성되지도 않았고 그때의 일본의 항해기술로는 그렇게 자주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신라를 자주 침략할 수가 없었음에 비추어,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신라를 침략한 왜라는 정치세력은 우리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위치가 반남과 시종의 고분군을 축조한 세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장례문화는 쉬 바뀌지 않아 왜의 주축 세력이 일본으로 쫓겨난 후에도 일부 잔존세력은 이곳에 남아 시종 자라봉의 고분을 축조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이는 일제시대 때 조선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가 반남 일대의 고분을 발굴 조사하여 이들 유물이 아마도 왜인의 것이라며 후일 <나주 반남면에 있어서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고 공언하였음에도 끝내 보고서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적이 있다.
이는 자신들이 조작한 광개토대왕 비문과 일본서기를 근거로 고대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통치했다는 임나일본설을 주장하여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이론으로 선전하였음에도, 아마 왜인의 것일 것이라는 반남 고분의 유물이 어쩌면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반남 일대의 고분 축조세력이 고대 일본열대를 지배한 사실을 증명 할 유물이 발견되어 덮어버리고, 귀한 유물이 매장된 사실만 공표하여 도굴꾼들의 도굴을 조장 방치하여, 지금 대부분 고분이 도굴되어 훼손된 사실과도 부합하다고 생각된다.
이상의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반남 시종 일대의 고분은 고대 한반도 남부 일대를 지배 했던 왜라는 정치 세력이 남긴 우리 민족사의 일부이자 소중한 유산이고, 이 고분의 체계적인 발굴과 학술 조사가 우리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주요한 열쇠니 만큼 보존과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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