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趙光祖), 지치(至治)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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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지치(至治)로

堯舜의 태평성대 꿈꾸다

얼마 전 치러진 제 19대 국회의원 선거가 흑색선전과 정치공세로 일관하여 정책선거를 바란 대다수의 국민의 여망에 끝내 부응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이는 아직도 우리의 정치현실이 통치철학의 빈곤과 부재에 놓여 있다는 반증이기에 이에 대한 반성 속에 오백여년 전 지치주의(至治主義)로 요. 순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치열하게 살다 간, 정암(靜庵) 조 광조 선생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지치란 서경(書經)의 군진 편(君陳 篇)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나온 말로,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명시킨다는 뜻이다. 유가의 이상세계인 요, 순 시대는 대동사회이다. 이러한 대동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지치란, 정치적 실천으로 당대의 군민(君民)을 요, 순 시대의 군민으로 만들어 직접 당대를 요, 순의 태평성대로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선생의 지치란 인간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세상이 바로 하늘의 뜻이 펼쳐진 이상세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동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덕성과 인성을 수양하여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졌음으로 하늘과 하나인 개개인이 수양하여 도덕을 실천하는 사회를 만드는 즉 지치의 대동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이었다.
이러한 도학정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선생의 지치의 개혁정치는 연산군 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여 이 땅에 요, 순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치를 실현하고 다스리는 근본인 군주가 마음을 바로잡아야 함을 강조하여 군주가 최고의 성리학자 즉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가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 군주가 격물, 지치, 성의의 공을 이룸으로서 마음을 밝혀 군자가 다스리는 이상 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치열한 개혁정치는 중종과 훈구세력의 반발로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아 죽임을 당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훗날 퇴계는 ‘조 광조가 도를 완성하기 전에 명성을 얻어 성급히 경세제민을 자임하였다’며 그의 성급함을 탄식하며 정치 보다는 학문연구에 치중하였지만, 율곡은 선생의 묘지명에서 ‘천도가 과연 공정 한가’를 물으며 선생의 삶을 긍정하며 자신도 지치의 실현을 위해 정치에 접목시켰다.
아무튼 38년의 짧은 생애와 정치일선에서 5년을 불꽃처럼 살다간 선생의 치열한 삶은 뒤에, 하서 김인후 등의 복권운동을 필두로 하여 선생은 문묘에 배향되고 기묘사화로 함께 화를 입은 김식의 후손, 잠곡 김육이 인조 때 ‘기묘제현 전’이란 책을 편찬하여 오늘날 기묘명현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가문에서는 이를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선생의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지향한 지치의 도학정신은 조선의 통치철학으로 퇴계와 율곡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인 표상이 되어 한국 유학의 기본적 성격을 형성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특정정파의 정치적 목표에 국한되지 않고 조선시대의 정치와 경제는 물론 문화에 이르는 총체적 시대정신이자 통치철학이었다.
대동 사회를 건설하려는 선생의 지치주의는 조선 오백년을 면면히 이어져 오늘날 통치철학의 빈곤으로 지역 간, 세대 간 갈등으로 소통구조가 시급한 오늘의 한국정치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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