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목민행서(牧民行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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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목민행서(牧民行書)로

조정현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 위원장 영암월출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가 승하한 후 신유년(辛酉年) 새해에 천주교를 탄압하는 신유박해의 피해자로 다산(茶山)은 기나긴 유배길에 오른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함께 꿈꿨던 조선의 부흥을 다 이루지 못하고,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나선 것이다. 유배지 장기현(현 경북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머무르다 바로 위의 형 약종의 죽음을 듣고 밤낮으로 오열하며 지내다,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한양으로 압송된 후,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각각 강진과 흑산도를 향하던 중형(仲兄) 약전과의 동행은 나주 밤남점(栗亭-현 동신대 정문 인근) 주막집에서 갈리어 기약 없는 이별의 인사를 나눈 후, 영암 땅을 밟고 누릿재를 지나 강진으로 넘어간다. 그는 이곳 주막에서 헤어지는 장면을 “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로 시작하는 ‘율정별(栗亭別)’이라는 시로 남긴다.
누릿재를 넘어 월남마을을 지나며 다산은 고향을 그리는 시 한 수를 더 읊는다. “누릿재 봉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긴 시간 나그네 뿌린 눈물을 더하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 보지 마소/ 봉우리 모두가 도봉산처럼 뾰족하네.” 강진 동문 밖 주막집 방 한 칸을 얻어 4년간 거처하면서 그 방을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란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였다. 4년 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잘 알려진 귤동의 산 속 오두막으로 이주하게 된다. 다산은 정조대왕과 자신이 꿈꾸던 세상을 다스리는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經世遺表)』, 죄수에 대해 신중히 심의하는 흠휼(欽恤) 사상에 입각해 재판하라는 뜻으로 관리들이 참고 할 수 있도록 지은 『흠흠신서(欽欽新書)』,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목민심서(牧民行書)』 등으로 대표되는 그의 방대한 저술활동은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은 『목민심서(牧民行書)』이다. 지방행정, 즉 우리 백성들의 삶과 가장 밀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익숙할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 자신이 저술한 책의 의미를 직접 남겨두었다. 그 서문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목(牧)의 의미를 “옛날에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을 계승하면서 12목(牧)을 불러 백성을 기르도록 하였으며, 주나라 문왕(文王)은 정치제도를 세울 때 사목(司牧)을 두어 목부(牧夫)라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평륙(平陸-옛 제나라 지명)에 갔을 때 가축 먹이는 일을 백성을 기르는데 비유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가리켜 목(牧)이라 한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라...”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의 정의대로 해석하자면 목민(牧民)은 백성을 부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또 서문의 마지막에 심서(心書)의 의미도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라고 밝혀 두었다. 다산이 서문에서 밝힌 대로 해석하자면, 목민심서는 다산이 몸소 실행할 방도는 없으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지방 관리들이 백성을 잘 부양할 수 있는 방법을 꼼꼼히 적어둔 책이다.
목민심서는 총 12부로 각 부마다 6개의 조로 이뤄져 있어 총 72개 조의 항목을 가지고 있으며 한글 완역판이 총 7권으로 구성되어 있을 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이 분량 전체를 다 찾아 이곳에서 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도 꼭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찾아 살펴볼 수는 있을 것이다. 1987년 개정된 현 헌법에 따라 지방자치가 다시 부활하여 1991년 기초의원과 광역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이어 1995년 단체장까지 선거를 통해 선출하게 됨으로써 완벽한 지방자치 시대를 시작한지도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방자치 시대에 다산이 200여 년 전에 남겨놓은 목민심서에는 우리가 꼭 참고해야 할 몇 군데 구절들이 있다. 몇 구절은 제2부 ‘율기육조(律己六條), 제4부 애민육조(愛民六條), 제5부 이전육조(吏典六條),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7부 예전육조(禮典六條)이다.
먼저 제2부 ‘율기육조(律己六條)를 살펴보면, (1조 칙궁(飭躬)-바른 몸가짐, 2조 청심(淸心)-청렴한 마음, 3조 제가(齊家)-집안을 다스림, 4조 병객(屏客)-청탁을 물리침, 절용(節用)-씀씀이를 절약함, 악시(樂施)-베풀기를 좋아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1조 칙궁과 4조 병객만 살펴본다. 1조 칙궁은 자신의 몸을 삼가다, 또는 살피다란 뜻으로 행동을 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살피고 삼가야 할 사항들에 대해 다산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상생활을 절도 있게 하고 옷차림은 단정히 하며, 백성들을 대할 때에는 장중하게 하는 것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수령의 도리이다”, “아랫사람을 너그러이 대하면 순종치 않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관부의 체통은 엄숙해야 하니, 수령의 자리 곁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치적이 성과를 올리고 뭇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마음을 얻은 뒤에 풍류를 벌여 백성들과 함께 즐긴 것은 선배들의 훌륭한 일이었다”. 4조 병객은 청탁을 하러 온 손님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주의할 사항 몇 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친척이나 친구가 관내에 많이 살면 거듭 단속하여, 사람들이 의심하고 비방하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서로 좋은 정을 보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릇 조정의 고관이 사신(私信)으로 긴밀히 청탁하는 것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친구와 궁한 친척이 먼 데서 찾아오면 즉시 영접하여 후하게 대접해 보내는 게 마땅하다”, “혼금(閽禁-관아에서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은 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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