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포 첨사 이세린(李世麟)이 왜선을 관측하여 전라병사 원적(元績)에게 보고하면서 원적은 바로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장흥부사 한온(韓蘊)과 함께 당시 영암군에 속해 있던 해양방어의 요충지인 달량성을 수비하기 위해 출동하여 수비하였으나, 점차 왜선의 수가 70여 척으로 늘어나면서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위협을 가하자 외부의 지원도 없고 이탈하는 병사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성안의 동요를 파악한 왜구들은 5월 13일 총공세를 펼쳐 성을 함락하고 전라병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을 살해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포로로 사로잡았다.
전라감사 김주(金澍)의 명령으로 해남현감 변협(邊協)이 전 무장현감 이남(李楠)과 함께 어란포(현 해님군 송지면 어란진항) 방어를 위해 가는 도중 왜구와 전투를 벌여 이남은 죽고, 변협은 해남으로 물러나 해남지역 방어에만 전념하였다. 전란 후 변협이 해남현성을 굳게 지켰음을 기리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는데 지금도 해남군청 앞마당에는 수성송(守城松)이라는 불리며 천연기념물 제430호로 지정되어 그 의를 되새기고 있다.
왜적들이 뱃길을 따라 점차 올라오면서 조선 중앙정부에서도 토벌군을 조직하여 준비태세를 강화하였다. 전라도 순찰사에 이준경(李浚慶), 전라우도 방어사에 김경석(金景錫), 전라좌도 방어사에 남치근(南致勤), 전라병사 원적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자리에 경상좌도 방어사 조안국(趙安國)을 불러 앉혔다. 중앙의 금군 500여 명과 기타 정병 80여 명을 전라도로 파견하였으며, 강화도 등 연안의 수령을 모두 무신으로 교체하여 대비하였다.
전라도 병마를 책임지는 전라병사 원적이 전란 초반에 전사하고 수군과 각 군현들마저 연전연패하면서 지휘관을 잃자 병사들은 도망가면서 전황은 급격히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강진만으로 들어온 왜구들은 이후 강진, 병영, 장흥을 차례로 침탈하면서 영암 땅을 향하고 있었는데 포로가 된 영암군수 이덕견을 대신하여 가장(假將)으로 무예에 재능이 있던 전주 부윤 이윤경(李潤慶)을 파견하고, 전라우도 방어사 김경석과 전라좌도 방어사 남치근이 함께 영암에 진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암 땅으로 곧장 달려온 이윤경, 김경석과 달리 남치근은 멀리 남평현(현 나주시 남평면)에서 관망만 하다가 영암성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후에야 뒤늦게 달려와 전투에 참여하는 척하였다.
왜구는 서쪽 해안을 따라 진격하여 어란포를 장악하였는데 5월 13일 전라우수사 김빈(金贇)과 진도군수 최인(崔潾)이 협공하여 어란포를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왜구는 진도의 남도포와 금갑도를 공격하였다. 5월 24일 해로를 따라 올라온 왜구들은 해남 우수영을 지나 영암 덕진포에 정박한 후, 영암성 밖 영암향교(현 영암읍 3구 괴성개 마을)에 진을 치며 영암성을 압박하였다. 영암성이 무너지면 가까이 나주를 지나 전주까지도 요원한 길이 아니었다.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는 전라도를 장악하면 한양까지도 내쳐 갈 수 있는 길이기에 조선 정부는 경상좌도 방어사 김세한(金世澣)을 서천포(현 충남 서천)로 파견하여 전라도를 지원하게 하였다.
5월 24일 왜구는 처음으로 영암성 밖에 모습을 드러냈고, 칼과 창을 휘두르고,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러 영암성을 위협하자 성안은 동요하기 시작하였지만, 이윤경과 김경석이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다. 『호남절의록』에 따르면, 가리포 첨절제사와 해남현감을 지낸 도포 봉호정 사람 양달사(梁達泗)는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 중이었으나, 영암사람들의 권유로 창의대(倡義隊)를 조직하였다. 그는 5월 24일 밤을 이용하여 조직된 의병을 역리 3구 뒷산 범바우산에 매복하게 하였고, 5월 25일 아침이 되자 광대패들에게 다양한 재주를 공연하게 하여 왜구를 기만한 후 기습공격 하였다. 이때 동문안에 준비하고 있던 이윤경도 김경석을 설득하여 출전 허가를 받고 날랜 병사들을 보내 협공하여 향교와 군더리(금다리-金橋)방죽(현 영암공설운동장)으로 이어진 영암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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