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의 속 ‘영암성대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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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을묘왜변의 속 ‘영암성대첩’ #2

조정형 영암읍도시재생주민협의체위원장
5월 25일 순찰사 이준경이 영암성 지원을 명하자 원래 영암에 있어야 했던 남치근은 그제야 남평을 떠나 영원(현 영암군 여운재 부근으로 추정)에서 왜구를 만나 접전을 벌이다가 창흘원(昌屹院-현 영산포)에서 유숙하고, 전라병사 조안국은 신북 모산리에서 적을 수색한다며 지체한 후, 두 부대는 영암성 전투가 끝난 5월 26일이 되어서야 영암성에 도착하였다. 관찰사 김주가 광주목사 이희손(李希孫), 강진현감 홍언성(洪彦誠), 나주판관 김기(金錡), 전 부사(府使) 박민제(朴敏齊), 마량첨사 홍수양(洪守讓) 등에게 함께 강진현을 지키도록 하였는데, 패퇴한 왜적이 5월 26일 강진현에 진입하자 이희손 등 지휘관들이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왜적들은 강진현을 짓밟은 후 병영성(兵營城)의 군량(軍糧)마저 모두 가져갔다. 만약 조안국과 남치근이 김경석, 이윤경과 조응하여 영암성 전투를 치렀다면 왜구를 모두 소탕할 수 있었겠지만, 뒤늦게 왜적을 쫓아 떠나가는 왜적선만 바라보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토벌군은 영암, 병영, 강진으로 통하는 길목인 작천에 주둔하였다.

강진을 떠난 왜선은 5월 27일 가리포성에 진입하여 약탈한 후, 장흥 회령포를 함락하고, 녹도진(현 고흥 녹동)으로 이동하여 포위하였다. 남치근이 대군을 이끌고 오니 왜적들은 금당도(현 완도군 금당면)로 옮겨 진을 치고 있었고, 6월 3일 이를 추적해온 남치근에 패퇴하여 흩어지게 되었다. 6월 21일 40여 척의 왜선이 보길도 방면에서 제주도를 향하여 출항한 후, 6월 27일 1천여 명의 왜구가 제주 화북진에 상륙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의 지휘 아래 군관민의 협공으로 3일간의 교전 후 왜적을 패퇴시킴으로써 을묘왜변은 종료되었다.

영암성 전투 당시 전라도 순찰사 이준경(李浚慶)은 나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주 부윤 이윤경의 친동생으로 형 이윤경의 안위를 걱정하여 수차례 서신을 보내 영암성을 벗어나 나주로 피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윤경은 동생의 부탁을 완강히 거절하면서 영암성을 튼튼히 지키면서 영암성대첩을 이끌어 전란 후 관찰사직을 제수(除授-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받게 되었다. 영암성대첩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영암사람 의병장 양달사는 유림의 여러 차례 건의 끝에 1847년(헌종 13년) 10월 19일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한편, 영암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자 자랑스러운 역사인 ‘영암성대첩’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하여 ‘영암성대첩기념사업회’에서는 영암성 승전일인 5월 25일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양력(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6월 23일을 영암성대첩 기념일로 정하였다. 기념사업회에서는 지난 6월 23일 기찬랜드 내에 있는 가야금산조 공연장에서 영암군민들을 모시고 영암성대첩 당시 순국하신 조상의 얼을 추모하기 위해 무용가 문치빈 선생님의 ‘살풀이춤’과 기예무단의 창작극 ‘영암성대첩’ 공연을 담아 영암성대첩 제469주기 기념식 행사를 진행하였다.
영암군민신문 y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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