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천자문탑과 천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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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천자문탑과 천자문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듣는 내고향 문화유산

왕인박사 유적지의 ‘천인천자문탑’은 2008년에 세운 것으로, 천자문을 한 사람이 한 글자씩 써서 영암석공이 이를 모아 돌에 새겨 만든 것이다.
탑 아래 부분은 배의 갑판을 상징하고, 가운데 원형으로 돌출된 부분은 황포 돗대와 파도, 영암의 달무리를 동시에 상징한다. 즉 갑판위에 천자문을 싣고 일본으로 항해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그렇다면 왕인박사가 어떻게 천자문으로 일본 천황과 대신각료들을 교화를 시켰을까?
왕인박사가 문산재에서 월출산에 자생하는 닥나무에서 원료를 추출하여 종이를 만들고, 여기에 직접 붓으로 쓴 천자문을 일본에 가져갔다. 이 천자문은 단순히 천개의 글자를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천지인(天地人)’을 바탕으로 중국의 철학과 역사, 인문, 지리 그리고 지은이 종요의 인생역정까지 담긴 대 서사시이자 탁월한 문학작품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는 천자문을 신이 내린 글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천자문은 2가지가 있는데 최초의 천자문은 서기 3세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魏)나라 종요(鐘繇 151∼230)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언고시 천자문을 저술했다. 4세기 당시의 왕희지(王羲之·322∼379) 붓글씨로 쓴 천자문은 ‘종요 천자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천자문은 6세기 때 양(梁)나라 주흥사(周興嗣·502∼549)가 쓴 것이다. 여기서 왕희지와 왕인이 모두 왕씨인데 왕희지가 40년 앞서 태어났지만 모두다 한문에 능통하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들이 혹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가끔 즐거운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5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AD405) 왕인이 가져간 천자문은 종요가 쓴 천자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천자문은 주흥사가 쓴 작품으로 한석봉이 쓴 것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왕인이 가져갔다고 하는 종요가 쓴 천자문도 일본에서 발견되었는데 영암군이 이를 구해 왕인유적지 사당에 종요 천자문과 주흥사 천자문을 동시에 비치하고 있다.
천자문은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4자(字로) 사언시(四言詩)가 되고 4자를 더 보태 팔언절구(八言句節)가 된다. 예를 들면 천자문 중에서 천황에게 던질만한 메시지로 ‘애육여수신복융강(愛育黎首臣伏戎羌)’이 있다. “백성(검은머리)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따뜻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신하나 변방에 사는 오랑캐까지도 왕 앞에 엎드려 왕의 지시를 따르고 존경한다”는 뜻이다.
왕인박사는 이처럼 천자문에 담겨진 심오한 뜻을 전파하는 방법으로 일본의 지도자와 백성들을 교화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암군민신문 www.ya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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