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종면 태간리 자라봉고분의 발굴조사 결과 무덤 양식이 전방후원분(무덤 전면은 방형기단이나 제단을 두고, 봉분은 둥근 원형의 형태로 조성한 양식 )으로 밝혀져 한·일 역사학계가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전형적인 왜(倭)식 고분으로 일본과 우리나라 영산강 유역에서 중점적으로 발견되어 일본 학계가 줄기차게 주장해온 임나일본부설(고대 왜가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주장) 의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입장에서는 약간의 우려도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나주 반남과 영암 시종 일대에 산재하고 있는 고분이 고대 일본 아니 왜식의 전방후원분이라는 점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대 역사서에 자주 나오는 왜(倭)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의, 즉 삼한의 남쪽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학설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류 역사학계의 입장은 고대 왜의 위치가 일본 열도에 있었다는 고정관념에 입각하여 우리 고대사를 상정하지만, 일부 역사학자와 필자는 고대 왜라는 나라는 우리 한반도 안에 위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입장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기록에 의해서다.
중국 진의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위서 한전에 의하면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해석하면 ‘왜와 접해 있다’에서 접(接)은 육지에서 서로 경계하고 있을 때 쓰는 글자지, 바다 건너에 있는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니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서의 경계를 표시한 위의 기록에서 남쪽의 경계에서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후한서 동이열전에 의하면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고 12국이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 변한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의 남쪽 한반도의 남부이다. 이는 적어도 중국의 삼국시대인 3세기에는 왜의 위치가 우리 한반도 남쪽에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중국 송서 왜국전에 의하면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의 송나라(420-479) 시대 때는 왜가 한반도가 아닌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후에 쓰인 모든 문헌에서는 왜가 일본열도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왜의 중심지가 5세기 어느 시점에 한반도를 떠나 일본열도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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