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해설사
왕인은 백제의 대학자로 일본 국왕의 초청을 받아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을 전해 주었으며 이후 일본 학문의 시조로서 숭앙을 받고 있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다.
이렇듯 왕인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고향인 영암에는 태어난 집터를 중심으로 한 어릴 때 공부하던 자리와 일본으로 떠날때의 포구 등 약간의 유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이곳저곳에 학문을 펴고 학문의 조상으로서 숭배를 받았던 때의 여러 유적지, 그후 그의 자손들이 일본 역사에 남긴 위대한 업적지 등 많은 역사의 현장이 남아있다. 그러므로 국내보다는 일본에 훨씬 더 많은 관계사적이 있으며 따라서 국내에서의 왕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아직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어 왕인에 관한 연보를 말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대의 관계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몇가지 문헌에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지역의 왕인박사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왕인박사현창협회 등 여러모임에서 국내외의 관계서적을 조사하여 많은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기도 하고 일본에서도 왕인박사 묘소 등 관계서적을 보호하는 모임이 있어 여러권의 논저를 출간하고 있다.
왕인박사에 관한 기록이 고대 문헌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왜 일까? 아마도 한성도읍기인 당시 상황에서는 왕인박사가 도읍지인 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암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누락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오늘날 우리는 두 역사책에 누락된 역사적 사상을 각 지방 답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내고 있으므로 누락문제로 의문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정사(正史)에 기록된 왕인이 결코 허구의 인물이 아님은 백제 석비에서 그 이름을 고국에 남길 수 있었던 사택지적의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왕인의 이름이나 그 사실의 기록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만으로 그를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하여 왕인과 구림, 왕인의 월출산, 왕인의 출생지 성기동, 왕인의 수학처인 문산재와 책굴 및 석인상, 왕인의 출항지 돌정고개와 배첩골 상대포 등은 왕인박사의 사적으로 크게 주목되는 곳이다. 일본에서는 왕인을 아스카 문화의 시조요, 일본의 대은인으로 추앙을 받고, 곳곳에 그의 위대한 덕을 기리는 묘, 석비, 신사 등을 세워놓아 추모제를 지내는 등 그 열기가 대단하다.
하물며 그 탄생지인 우리나라에서 그분의 대한 예우가 당연히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왕인박사현창협회에서 왕인박사의 위대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76년11월11일 탄생지인 성기동에 유허비를 세웠는데 그 비에 새겨진 글 가운데 가장 마음에 와닿는 한구절은 옮겨 적는다면 다음과 같다. ‘은혜 중에서도 물질의 은혜보다는 사상과 학문과 문화를 끼쳐준 은혜가 더 크고 고귀한 것이며 또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거룩하고 장한 것이니, 그러므로 일찍 일본민족에게 학문의 은혜를 끼쳐 그들의 역사상에 큰 획기를 지어준 백제의 왕인박사야말로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인물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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