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로 꽃들이 졌다 소리도 내지 못한 울음들이 목안에서 말랐고 "미안해요"라는 말만 차가운 거리에 회오리쳐 돈다 슬픈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애도하는 마음 안고 왕인묘전제 가는 길 마음 무겁다 논어10권과 천자문1권을 가지고 백제의 기술자들과 일본으로 떠났던 왕인은 태자의 스승으로 학문을 펴며 일본에 문명을 일깨워주고 환한 길을 열어주었다 백제인의 혼이 담겨진 법륭사에 들어가니 빗물 스미듯 젖어오는 ...
영암군민신문770호2023.08.18 15:08세상이 다 초록인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납작한 팔을 뻗쳐 바람을 안고 춤추는 날이 많아졌다 누군가 신호탄을 띄웠을 것이다 꼬물이들은 밤낮으로 초록이들을 탐구했다 갈색 마디가 오체투지로 지난 자리마다 동그라미와 세모와 마른모와 타원 도형이 날마다 새끼를 쳤다 그날 아침 초록은 걷고 싶었던가 차렷 자세로 일어서더니 엉뚱하게 안으로부터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닫힌 문을 들락거리며 업은 달을 키운 달팽이 가으내 겹겹이 닫아건 문 앞에...
영암군민신문769호2023.08.11 15:05푸르름이 무성한 여름날 담쟁이 덩굴이 옆집 답벼락을 3층째 기어오르고 있다 붉은 벽돌이 신록으로 채색되어가는 것이 누가 연록의 물감을 듬뿍 붓에 묻혀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 같다 그런데 더 이상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벽돌색을 닮아가는 담쟁이 그림 누군가가 담쟁이 밑줄기를 칼로 그어버린 것이다 生은 담쟁이처럼 절벽을 오르는 일이어서 숨 가쁘게 오르다보면 목적지에 이르기도 하지만 느닷없이 길이 사라져 일탈하기도 하는 것. 누군...
영암군민신문768호2023.07.28 14:34한쪽 남은 청력에 보청기를 끼고 스마트폰을 열어 손가락으로 '톡, 톡' 손가락이 건조해 몇 번이고 시도하여 멀리 있는 자식들과 영상 통화로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나도 배울란다. 사진 찍는 거 가르쳐 도라∼" 소설(小雪)이 지나가는 11월 된서리에 초연한 국화꽃을 보여주고 싶으시나 보다 사진 찍는 것은 식은 죽 먹기 금방 할 수 있다, 잘 할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격려에 단기기억의...
영암군민신문767호2023.07.21 13:51초음파 검사실 모니터에 나타난 부채 모양의 얼룩나비 쉼 없이 팔딱이며 빨갛게 파랗게 반짝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비 모양의 심장이 팔랑팔랑 날갯짓하고 있다 날개 소리가 우렁우렁한다 저 나비가 내가 까무러치게 놀라 움츠러들 때 가슴 움켜쥐며 슬퍼 할 때 터질 듯 괴로워 할 때 기쁨으로 부풀어 오를 때 둥둥거리며 내 가슴을 두드리던 그것인가 한 번도 밖이 되어보지 못한 그것을 한 번도 안이 되어보지 못한 내가 가만히 눈으로 만져 본다...
영암군민신문766호2023.07.14 14:04해묵은 물건이 들어 있는 서랍을 열었는데 빛바랜 편지 뭉치가 눈에 띈다 오래전 아들이 군에서 보내온 편지들 요즘은 군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어 수시로 안부를 듣고 전하니 편지를 주고 받을 일이 없다는데 무엇이든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변하는 세상이니 우표가 붙은 편지 봉투를 뜯을 때 심장이 쫄깃해지며 콩닥거리는 느낌을 아들의 아들은 알까 곰삭은 손편지 다시 읽어 보며 아슴한 기억을 더듬는 기분을 아들의 아들은 알까 푹 익은 묵은 김...
영암군민신문764호2023.06.30 16:10나무 베어 불을 때던 시절 구적골 문중 산 산판 나무 해마다 선 채로 산다 손길 바쁜 논매기 끝나고 벼이삭 익어가는 늦여름 낫 몇 자루 숫돌에 쓱쓱 갈아 지게 지고 산판 올라 나무를 벤다 우리 집 산판은 뒷골 남향 산허리 나무살 좋고 고사리 지천으로 돋아나는 곳 도라지꽃 수놓은 뻑국새 골짝 아버지 숙부 베어 말린 나무들 등 지게로 내려 뒤란 해묵은 밤나무 아래 집채처럼 벼눌로 쌓인다 땀내 절은 이 땔감, ...
영암군민신문763호2023.06.23 16:14샛별은 하늘에서 반짝인데 눈만 뜨면 아른아른 땅에서도 번쩍이네. 어느날 돌이더라 하였더니 입학이구나. 무럭무럭 팔척 장송자라서 찌든 가난 허덕이는 힘없는 잡초들 밥 한끼 서로워 잠 못 이룬 밤이면 어디선가 일어나라, 힘내라. 앞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소서. 온 사랑받고 태어난 샛별이건만 회초리의 그 맛 변치 않기를 간절한 이 기도 천지신명께 올리오니 대한의 태평세상 함께 열게 하소서. 전갑홍 세한대 평생교육원 겸임교수...
영암군민신문762호2023.06.16 14:42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시골길 역주행한 붉은 차와 충돌하고 깨어보니 저승을 놓고 온 이승의 내가 있다 다들 죽었다고, 가망이 없다고 돌아서는 나를 끝없이 돌려세운 노모의 앙상한 손가락 깊어진 주름에 눌러 붙은 눈물 자국이 찍혀있다 물로 가득 찼던 당신의 빈 속 당신이 건너야 할 다리는 몇 개 일까요 가픈 숨 꽃 피워내던 시간들이 자욱한 안개를 닮아 있다 뭔가 감추었던 막막한 일들 아득하게 만져지는 흐린 시간들 잿빛을 견디며 가슴속 ...
영암군민신문761호2023.06.09 15:22지게에는 햇살을 가득 퍼담고 흙물이 밴 헌운동화로 들길을 걸어오시는 아버지 밭길 고랑마다 가을이 가라앉아 붉게 타 오르고 당신의 땀방울은 알알이 터지는데 아버지는 어디만큼 서시고 둥근달을 기르고 계시는가 가을은 지는 잎보다 더 가볍게 눈 속의 발목보다 더 시리게 뒷동산을 허무는데 대나무 숲가엔 어머니가 먼저 와 햇살을 길어담고 소의 미간을 쓰다듬으시며 오시는 그 분이 낯익은 기침소리 ...
영암군민신문760호2023.06.02 14:53